‘선발제인’의 리버풀일까, ‘후발제인’의 맨체스터 시티일까?[최규섭의 청축탁축(清蹴濁蹴)]
OSEN 우충원 기자
발행 2024.12.25 13: 14

선발제인(先發制人: 먼저 출발하여 제압한다)과 후발제인(後發制人: 나중에 출발하여 제압한다)은 상대되는 개념으로, 군사상 흔히 사용하는 모략이다. “무기 없는 전장(戰場)”으로 곧잘 비유되는 스포츠에서도, 그대로 통용해 쓸 수 있는 방책이기도 하다. 기선을 제압한 기세를 몰아 승리 또는 우승을 구가한다면 선발제인을 잘 운용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상대의 기가 쇠퇴하기를 기다렸다가 반격해 역전극 또는 역전 우승을 구가한다면 후발제인을 잘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모략이 더 뛰어나다고 단정해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피아(彼我)의 전력, 판세와 전개 상황 등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때그때 시의에 맞는 방책을 써야, 최소한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을[百戰不殆·백전불태] 것이다. 당연히, 스포츠에서도 매한가지다. 특히, 대장정이 펼쳐지는 페넌트레이스(Pennant Race)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처음부터 독주 끝에 이루는 정상 정복도 볼만하겠으나, 움츠렸다가 단숨에 비약의 날개를 활짝 펴 이루는 등정도 지켜보는 묘미가 있다.
리버풀이 한껏 기분이 고조된 채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 2024-2025시즌 전반부의 왕좌를 차지한 주인공은 분명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17라운드(15라운드 리버풀-에버턴전은 연기)가 치러지는 동안, 리버풀은 여섯 라운드(1~5라운드, 9라운드)를 뺀 모든 라운드에서 1위를 달렸다. 특히, 10라운드부터는 단 한 차례도 1위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선발제인의 효용을 한껏 누렸다고 할 만한 기세요 상승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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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EPL 클럽 가운데, 리버풀은 가장 선발제인에 능숙한 팀이다. 1888년 첫걸음을 내디딘 풋볼리그 1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리버풀은 21회나 선두 상태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1992년 출범한 EPL로 국한해도 이번 시즌까지 일곱 번이나 된다. 그만큼 시즌 초반에 맹렬한 기세를 뽐냈던 리버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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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번 시즌 우승 팀은 일찌감치 리버풀로 판가름 났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정답은 50%였다. EPL 역대 시즌을 토대로 한 통계가 말해 주는 수치다. 과연 어떻게 해서 50%가 답으로 나왔는지 들여다보자.
초반부 기세 리버풀이 선발제인 효용 살려 시즌 마지막까지 독주할지가 후반부 관심사
EPL은 2023-2024시즌까지 32회 펼쳐졌다. 이를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해서 그때 1위에 자리한 팀이 시즌 정상에 올랐는지를 살펴보면, 딱 절반의 경우에만 그러했다. 곧, 열여섯 시즌은 크리스마스 시점 1위 팀이 시즌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나머지 열여섯 시즌은 크리스마스까지 1위를 달렸던 팀이 역전극의 제물이 되며 정상을 밟지 못했다.
이 확률을 감안하면, 리버풀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할 듯싶다. 돌아보고 싶지 않을 만큼 초라한 전적이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까지 6회(1996-1997, 2008-2009, 2013-2014, 2018-2019~2020-2021시즌)나 크리스마스 시점에 1위 자리에 앉았으나, 그 가운데 5회는 대장정이 끝나면서 내려와야 했다. 2019-2020시즌만 역전을 허용하지 않고 그대로 정상까지 내달리며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다시 말해 선발제인의 묘를 잘 살려 EPL을 평정한 시즌은 단 한 차례였다.
리버풀과 대척점에 존재한 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크리스마스을 맞을 때까지 1위에 나서지 못했다가 이후 활화산처럼 용솟음치는 기세로 역전 우승한 시즌이 무려 여덟 차례에 이르렀다(표 참조). 특히, 1995-1996시즌은 엄청난 역전 우승의 짜릿함을 자아냈다. 크리스마스 시점에 1위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두 자릿수 승점 차(10점)까지 뒤졌으나, 후반부 대폭발에 힘입어 우승의 승전고를 울렸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1위)와 뉴캐슬 유나이티드(2위)의 자리바꿈과 함께 시즌의 막이 내렸다.
그만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후발제인에 능했다. EPL 출범 이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최다(13회)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그 가운데 여덟 번은 후발제인으로 이룬 등정이었다. 반대로 1위를 달리다가 오히려 다른 팀의 후발제인에 휘말려 주저앉은 경우는 두 번(1997-1998시즌 2위, 2003-2004시즌 3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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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벌이는 ‘맨체스터 더비’의 맞수인 맨체스터 시티도 후발제인에 뛰어났다. 다섯 번씩이나 역전 우승극을 연출하며 환호했다. 그중 가장 큰 격차를 뒤집고 등정의 기쁨을 만끽한 시즌은 2020-2021시즌이었다. 크리스마스 시점에, 8위였다. 뿐만 아니라, 1위와 승점 차도 두 자릿수에 가까웠다(8점).
비율로 본 역전 우승 면에선, 맨체스터 시티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아주 근소하게 앞섰다. 62.5%(5/8)의 맨체스터 시티와 61.5%의 맨체스터 시티의 차는 무척 미미했다.
대역전 우승의 묘미를 팬들에게 한껏 선사한 팀으로, 아스널을 빼놓을 수 없다. 1997-1998시즌에, 승점 13의 큰 격차를 뒤집고 정상을 밟았다. 서른두 번의 시즌 가운데, 아직 최다 승점 차를 뒤집고 우승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희생양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크리스마스 시점 순위도 6위에 불과했던 아스널이 빚어낸 대역전극은 그만큼 팬들을 매료했다. 대단원의 막이 내렸을 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주역에서 조역(2위)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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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발제인을 부르짖는 리버풀이 초반부 기세를 끝까지 밀고 나갈지, 후발제인을 외치는 맨체스터 시티를 비롯한 첼시·아스널 등이 후반부 역전의 묘미를 자아낼지, 시즌을 접을 때까지 눈길을 뗄 수 없게 하는 EPL이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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