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제 꿈은 늙어 죽는 겁니다. 맞아 죽거나 굶어 죽지 않고 곱게 늙어 죽는 거요. 발목이 잘리거나 머리채가 잘리지 않고 그저 사는 것이요. 운이 좋으면 바닷가 작은 집에서 아버지랑 숨어사는 거요.”
JTBC 토일드라마 ‘옥씨부인전’의 주인공 구덕이(임지연 분)가 밝힌 소망이다. 그 소망에 따르면 맞아 죽고 굶어 죽는 일이 다반사요, 발목이 잘리고 머리채가 잘리는 일이 빈번한 야만의 시대로 보인다. 살아있는 존재가 ‘그저 사는 것’을 소망한다니 다분히 비인간적이다. 그나마 숨어 살지언정 ‘바닷가 작은 집’을 거론하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다운 욕망이 엿보인다.
드라마의 시대 배경은 좀 모호하다. ‘경국대전’이 아닌 ‘대명률’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성종 이전 조선 전기로 보이는데 ‘악의 축’ 유향소와 평시서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세조 연간이 유력해 보인다.
유향소는 태종이 없앴고 세종이 부활시켰으며, 이어 세조가 말년에 철폐했고 성종때 다시 만들어졌다. 아울러 태조가 세운 경시서는 1466년(세조 12년) 평시서로 명칭을 바꾸었다.
어쨌거나 구덕이로 대변되는 노비들의 처지가 이 지경이었다는 점은 ‘동북아의 문명국’이란 당시의 자부심이 무색할만큼 씁쓸한 소회를 불러 일으킨다.
드라마는 제법 파격적으로 시작된다. 오라진 채 끌려가는 죄인들 틈에 자줏빛 한복 곱게 차려입은 양반가 부인 행색의 구덕이가 도도히 함께 걸음을 옮긴다.
주변 소음이 그 구덕이를 설명한다. “어떤 대단한 년이 남편이 둘이야?” “저 년 천한 노비출신이라더니 어디서 감히 양반 행세를 해!” 구덕이는 남편이 둘인 여자에 양반 행세한 노비였다. 시작부터 센세이셔널하다.
본인도 스스로를 설명한다. 오라를 지우려는 나졸을 상대로 당당히 말한다. “혐의가 있어 조사를 받으로 온 것 뿐이니 묶어선 안될 것입니다. 형구를 사용하면 안되는 사람에게 형구를 사용하면 대명률 419조에 따라 장 60대를 맞는 걸 아십니까?” 당당하고 똑소리 나고 법에 정통하다.
그렇게 시작된 구덕의 이야기. 구덕은 김낙수(이서환 분) 집 노비로 성질 고약한 외동딸 김소혜(하율리 분)의 몸종이다. 김낙수는 출신은 변변찮지만 평시서 재직 시절 뒷돈을 챙겨 재물만은 차고 넘치는 졸부다.
그 김낙수의 명으로 병에 걸린 엄마가 아버지 개죽(이상희 분)의 지게에 실려 버려진 채 죽어갔다. 그 이후 아버지마저 해소병에 걸리자 구덕은 똑같은 운명을 예감하고 도망을 계획한다. 다행히 게으른 김소혜가 제 일조차 구덕이에게 떠넘김으로써 자수는 물론 문자까지 도통했다.
그런 와중 김소혜와 혼담이 오가던 전 경기 관찰사 송병근(허준석 분)의 서자 송서인(추영우 분)을 우연찮게 저자에서 만나게 된다. 기생 출신 어미의 예능감을 물려받은 송서인은 하루하루 수고한 사람들한테 행복을 주는 것이 예인의 힘이라는 구덕의 말에 예인으로서의 운명을 깨치고 두 사람은 신분격차 없는 동류로서 서로를 연모하게 된다.
하지만 구덕은 그 송서인 집에 숨어있다 발각돼 김낙수에게 몸을 버릴 위기에 처한다. 다행히 동료 노비들의 도움으로 아비 개죽과 탈출한 구덕은 끝분이(김정영 분) 주막에 몸을 의탁하는데 아비인 개죽은 짐이 되지 않기 위해 홀로 사라진다.
그 끝분네 주막에 청나라 사신단 부사로 참가했던 옥필승(송영규 분)-옥태영(손나은 분) 부녀 일행이 찾아들고 구덕은 편견 없이 따뜻한 옥태영으로부터 옥가락지를 선물받는다.
하지만 부사일행의 재물에 눈 먼 화적패의 습격으로 모든 일행이 살해되고 옥태영으로 착각된 구덕만 구해져 옥씨가문에서 눈을 뜬다.
옥태영의 할머니 한씨부인(김미숙 분)은 구덕이가 신분을 밝혔음에도 엽렵하고 따뜻하고 재기 발랄한 그녀를 손녀 삼기로 하고 옥태영으로 살 것을 권유한다.
제 2의 삶을 살게 된 어느 날 송서인이 전기수가 되어 다시 구덕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구덕은 함께 도망치자는 제안을 거절한다. “아씨 대신 얻은 삶을 구덕이가 살 순 없습니다.”면서.
송서인이 떠난 자리엔 그를 꼭 빼닮은 청수현감 성규진(성동일 분)의 맏아들 성윤겸이 등장한다. 성윤겸은 옥태영의 몸종 백이(윤서하 분)의 죽음을 밝혀내고 양반 모독죄로 죽음의 기로에 선 막심(김재화 분)을 외지부로서 구해낸 구덕의 박애심과 영민함에 매료돼 청혼한다.
모두가 찬성하고 나선 혼사. 하지만 자신의 노비팔자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사는 구덕이로선 섣불리 그 혼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 별 수 없이 성윤겸에게 자신의 진짜 신분을 밝히려는 순간 나타난 김소혜로 인해 또다시 위기에 봉착하는 구덕의 모습. 8일 방영된 3회의 엔딩이었다.
드라마를 통해 드러난 조선조 노비실태는 비참하다. 실제로 노비는 생구(生口)라 불리며 수효를 셀 때도 가축처럼 한 구, 두 구 식으로 세어졌다.
희대의 성군 세종조에도 노비에 대한 처우는 마찬가지였다. ‘세종실록’ 1434년 6월 27일 기사는 형조에서 세종에게 올린 계문을 소개하고 있다. “잔인하고 포학한 무리들이 한결같이 노비가 고소(告訴)할 수 없으니 함부로 때려죽이옵는데(殘暴之徒, 一於奴婢不得告訴, 擅自歐殺)..” 그러니 당시의 노비들은 구덕이처럼 늙어 죽는 것이 유일한 소망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드라마는 구덕이 밝힌 “하늘 아래 같은 사람인데 어찌 천하고 귀함이 있는 지”란 처절한 주제를 제법 경쾌하고 코믹하고 스피디하게 풀어내고 있다.
앞으로 외지부로서 핍박받는 백성들 편에서 시대에 저항해 나갈 구덕의 행보가 궁금하다. 아울러 연기자 임지연의 저력 발휘도 기대를 키운다.
그나저나 이 희대의 여전사 구덕이 구설처럼 성윤겸·송서인까지 이부(二夫)의 아내가 되는 전개는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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