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시즌 초반이라고 하지만 믿기지 않는 일이다.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가 순위표 맨 꼭대기를 점령했다. 개막 경기 제외하면 무려 17년 만에 단독 1위에 등극한 것이다.
한화는 지난 30일 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에서 열린 KT 위즈와 홈경기를 8-5로 승리했다. 개막전 패배 후 6연승을 질주한 한화는 1988년, 1992년, 1998년에 이어 구단 역대 4번째로 개막 7경기 기준 6승1패를 기록했다. 26년만에 최고의 시즌 스타트를 끊은 것도 모자라 단독 1위로 뛰어올랐다.
같은 날 개막 4연승을 달리던 KIA 타이거즈가 잠실구장에서 두산 베어스에 0-8 완패를 당하면서 한화가 2위에서 1위로 올라섰다. 이제 7경기밖에 하지 않은 시즌 극초반이지만 한화가 단독 1위에 오른 것 자체가 사건이다. 2008년부터 깊은 암흑기에 빠진 한화가 순위표 맨 위에 있는 게 놀랄 노 자(字)가 아닐 수 없다.
한화가 가장 최근 단독 1위에 오른 것은 지난 2014년 3월30일로 정확히 10년 전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시즌 첫 경기를 치른 시점으로 어떤 변별력을 갖기 어려웠다. 3월29일 사직구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롯데 자이언츠와의 개막전이 4개 구장에서 유일하게 우천 취소된 한화는 이튿날 롯데에 4-2로 승리했다. 그런데 나머지 8개 팀이 개막 2연전에 나란히 1승1패를 주고받으면서 한화 홀로 1승 승률 100%로 아주 잠깐 단독 1위에 올랐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7경기 만에 9위로 추락했고, 시즌 최종 순위가 되면서 2년 연속 최하위로 시즌을 마쳐야 했다.
한화가 개막 7경기 이상 치른 시점에서 1위에 오른 것은 2009년 4월14일이었다. 당시까지 개막 9경기에서 한화는 5승3패1무(승률 .556)로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 두산과 함께 공동 1위에 올랐다. 단독 1위는 아니었다.
같은 기준으로 한화가 단독 1위에 랭크된 것은 2007년으로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해 6월2일까지 45경기를 치른 시점에서 24승20패1무(승률 .545)로 2위 SK에 0.5경기 차이로 앞선 단독 1위였다. 그해 한화는 정규시즌 3위로 가을야구에 진출했다. 3년 연속 가을야구에 나간 시절로 2008~2017년 10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암흑기 이전의 마지막 불꽃 같은 시즌이었다.
그로부터 무려 6146일(16년10개월6일) 만에 한화가 단독 1위에 올랐다. 암흑기가 시작된 이후 개막 첫 주부터 순위 싸움에서 밀리기를 반복했던 한화이지만 올해는 개막전 패배 후 6연승으로 반등하며 초반부터 선두로 치고 나왔다.
지난해 시즌을 마친 뒤 한화는 새 외국인 타자로 외야수 요나단 페라자와 계약하고, 외부 FA로 내야수 안치홍을 4+2년 최대 72억원에 영입했다. 2차 드래프트로 외야수 김강민을, 방출 시장에서 포수 이재원을 데려와 뎁스를 강화한 한화는 지난 2월 중순 스프링캠프 기간 ‘메이저리거’ 투수 류현진을 8년 170억원에 전격 복귀시키면서 기대감을 크게 증폭시켰다.
다크호스에서 일약 5강 후보로 떠올랐지만 ‘우승 후보’로 보는 외부의 시선도 일부 있었다. 한화도 리빌딩 종료를 선언하면서 윈나우 버튼을 눌렀지만 이렇게 시즌 초반부터 빠르게 치고 올라올 것이라곤 내부에서도 예상을 하지 못했다.
최원호 한화 감독도 30일 KT전을 앞두고 개막 6경기 5승1패에 대해 “이런 성적을 예상할 순 없었다. 잘하길 기대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은 생각 못했다. 선발투수들이 잘 던져줬고, 타선에선 페라자가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고 있다. 지금까진 페라자가 이끈 것이다. 사실 아직 다른 타자들 페이스가 많이 올라오지 않았는데 LG전에선 채은성이 잘 쳐주고, 문학에 가선 노시환이 안타를 많이 생산하진 않았지만 홈런 2개를 쳤다. 안치홍도 점점 페이스를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6연승을 거둔 30일 KT전에서 페라자가 3회 선제 결승 솔로 홈런과 2루타 포함해 3타수 2안타 1타점 2볼넷으로 4출루 경기를 펼쳤다. 좌우 타석을 안 가리는 스위치히터로 시즌 7경기 타율 5할2푼(25타수 13안타) 3홈런 5타점 6볼넷 5삼진 OPS 1.594로 무섭게 치고 있다. 안치홍도 이날 3회 투런포로 이적 첫 홈런을 신고했고, 11타수 무안타였던 정은원도 첫 안타를 3루타로 장식하며 혈이 뚫리더니 멀티히트 포함 3출루로 반등을 알렸다.
무엇보다 선발 야구가 되는 게 고무적이다. 팀 평균자책점 3위(3.19)에 오른 한화는 선발 평균자책점이 2위(2.68)로 경기 초반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다. 류현진이 선발로 나선 2경기를 빼고 5경기가 전부 선발승으로 2승을 거둔 펠릭스 페냐를 비롯해 리카르도 산체스, 김민우, 문동주까지 선발들이 제 몫을 다하고 있다.
류현진은 아직 승리가 없지만 그가 1선발로 들어가면서 나머지 4명의 투수가 선발 매치업상 우위를 점하고 들어가는 게 크다. 1선발로 조금은 아쉬운 페냐가 2선발로는 충분히 경쟁력 있고, 4~5선발 산체스와 문동주는 리그 최상급이다. 최원호 감독도 “선발 자리에 위기감을 갖는 선수들도 있었고, 류현진이 와서 전체적으로 투수들이 좋은 쪽으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SSG 랜더스와의 주중 3연전을 싹쓸이하며 2006년 5월 이후 18년 만에 인천에서 스윕을 한 한화는 31일 KT전까지 2연속 스윕을 노린다. 김민우가 왼쪽 날갯죽지에 담이 오면서 로테이션을 한 차례 건너뛰는 가운데 전체 1순위 신인인 좌완 황준서가 선발투수로 1군 데뷔전을 갖는다. 만약 한화가 또 이기면 개막 8경기 7승1패로 1992년 전신 빙그레 시절 구단 최고 성적과 타이를 이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