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가 보여줄 수 있는 낭만 그 자체였다. 23년간 홈으로 뛰었던 인천을 상대팀 선수로 방문한 김강민(42·한화 이글스)에겐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김강민은 지난 26일 인천 SSG랜더스필드에서 열린 SSG 랜더스와의 원정경기에 7회말 중견수 대수비로 교체출장했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한 뒤 지난해까지 무려 23년간 원클럽맨으로 몸담은 친정팀을 상대로 다른 유니폼을 입고 처음 만난 것이다. 지난해 11월22일 충격의 2차 드래프트 이적 이후 125일 만이었다.
김강민이 SK-SSG 시절 입었던 등번호 0번의 각양각색 유니폼이 랜더스필드 관중석 곳곳에 걸려있었다. SSG 팬들이 준비한 옛 스타 맞이였다. 상징과 같았던 0번을 인천에서의 추억으로 묻어두고 한화에선 9번을 달고 새출발한 김강민에겐 여러모로 감회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7회말 랜더스필드의 익숙한 외야로 들어간 김강민은 중견수 자리에서 모자를 벗어 팬들에게 인사했다. 하지만 이왕이면 더 좋은 모습으로 인사할 수 있는 타석이 간절했다. 경기 후반 투입으로 자칫 타석에 들어서지 못할 수 있었지만 9회초 투아웃 이후 앞 타자 최재훈이 SSG 투수 조병현과 풀카운트 승부 끝에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김강민이 친정팀 팬들을 향해 제대로 인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응원팀 투수가 볼넷을 허용했지만 SSG 관중석에도 큰 박수가 터져나올 만큼 인천 팬들도 이 순간을 기다렸다.
김강민 타석이 되자 그의 등장곡인 러브홀릭스의 ‘버터플라이’가 그라운드에 흘러나왔다. 그동안 1루 쪽에서 걸어나오던 김강민이 3루 쪽에서 나왔지만 인천 팬들의 환호는 그대로였다. 1루측 홈 관중석에서 더 큰 환호 소리가 터졌다. 많은 팬들이 김강민의 SSG 시절 유니폼을 들고 그의 인천 방문 첫 타석을 반겼다.
이 순간 주심을 맡은 이계성(47) KBO 심판위원이 ‘센스’를 발휘했다. 올해부터 KBO도 피치클락을 시험 운영 중이라 주심으로선 마냥 시간을 줄 순 없었다. 하지만 이떄 이계성 심판은 본부석을 향해 손을 들더니 홈플레이트 전체를 솔로 쓸면서 정리했고, 김강민과 인천 팬들을 위한 시간을 벌어줬다. 그 덕분에 김강민은 1루와 백네트 그리고 외야 관중석을 향해 3차례나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하며 팬들과 교감했다.
메이저리그에선 이런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지난 20일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LA 다저스의 MLB 월드투어 서울시리즈 개막전 때 김하성(샌디에이고)이 2회 첫 타석에 들어설 때도 그랬다.
당시 주심을 맡은 랜스 박스데일 심판이 갑자기 홈플레이트를 쓸고 정리하면서 김하성이 고국 한국 팬들과 인사할 수 있는 시간을 여유 있게 줬다. 이에 김하성은 피치클락을 준비하지 않고 한국 팬들에게 헬멧을 벗어 두 팔 들어 인사했다. 당시 김하성은 박스데일 심판에게 미소를 띤 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고마움을 나타냈다.
메이저리그에서나 볼 법한 심판의 낭만을 이날 김강민을 위해 이계성 KBO 심판이 보여줬다. 1996~2005년 현역 시절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롯데 자이언츠에서 10년간 활약한 외야수 출신 이계성 심판은 은퇴 후 2006년부터 KBO 심판으로 변신, 올해로 19년차가 된 베테랑이다.
팬들에게 인사로 끝이 아니었다. 김강민 타석 때는 장관이 연출됐다. 1루와 3루, 홈과 원정을 가리지 않고 양쪽에서 김강민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 김강민이 한화에서도 SSG 시절 응원가를 그대로 쓰면서 양 팀 팬들이 한 선수를 위해 다함께 응원가를 부르는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됐다.
SSG 투수 조병현도 3구 연속 직구로 정면 승부하며 김강민에게 예우를 갖췄다. 초구 직구에 배트가 헛돌며 놀란 표정을 지은 김강민은 3구째 직구를 쳤으나 중견수 뜬공으로 아웃됐다. 하지만 모든 관중석에서 그를 향해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경기는 6-0 한화의 승리로 끝났지만 김강민을 다시 만난 SSG 팬들에게도 잊지 못할 하루였다.
경기 후 SBS스포츠와 방송 인터뷰에 나선 김강민은 “반갑게 맞이해주신 SSG 팬들께 너무 감사드린다. 한화 팬분들은 항상 인천에 많으시다. 홈경기 같은 느낌을 받아 너무 좋다. 잊지 못할 하루가 될 것 같다”며 감격한 모습이었다.
인터뷰를 마친 뒤에도 김강민은 관중석에 남아 응원을 보낸 팬들을 향해 두손 들어 웃으며 화답했다. 기록은 1타수 무안타였지만 이날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김강민. 당사자는 물론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진한 여운을 남긴 낭만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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