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30·LA 다저스)가 12년을 알고 지낸 통역사 미즈하라 잇페이의 도박 혐의로 뜻하지 않은 구설에 휘말리고 있다. 오타니는 SNS에 미즈하라와 함께 찍은 사진들을 삭제하면서 ‘손절’에 나섰다.
오타니는 지난 23일(이하 한국시간) 자신의 SNS에 게재한 미즈하라와의 사진을 모두 지웠다. 지난해 8월 전 소속팀 LA 에인절스 시절 팀 동료 마이크 트라웃과 함께 촬영한 사진, 올해 1월 전미야구기자협회(BBWAA) 만찬에서 에이전트 네트 발레로와 같이 찍은 사진에 미즈하라가 있었는데 모두 삭제했다. 앞서 미즈하라와의 SNS 계정 팔로우도 끊었다.
지난 21일 MLB 월드투어 서울시리즈 개막 두 번째 경기를 앞두고 오타니는 미즈하라가 절도 및 도박 혐의로 해고돼 논란의 중심에 섰다. 2021년부터 불법 스포츠 도박에 손을 댄 미즈하라는 연방 정부의 수사를 받고 있는 남부 캘리포니아의 불법 도박업체로부터 최소 450만 달러의 빚을 졌고, 오타니가 대신 갚아줬다고 밝혔다. 최초 보도한 ESPN은 오타니의 계좌에서 지난해 9월과 10월 각각 50만 달러의 금액이 불법 도박업체를 운영하는 매튜 보이어에게 송금된 내역을 확인했다.
미즈하라는 ESPN과 첫 인터뷰에서 “오타니에게 나의 상황을 설명했다. 오타니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나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난 빚을 갚기 위해 송금을 해야 한다고 말했고, 오타니는 그게 불법인지 아닌지 묻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자 오타니 측에서 미즈하라에게 대규모 절도 피해를 당한 것이라고 반박했고, 미즈하라도 보도가 나온 뒤 말을 바꿔 “오타니는 도박 빚을 알지 못했고, 돈을 송금하지도 않았다”고 번복하면서 의혹이 증폭됐다.
오타니가 직접 베팅을 하지 않았더라도 미즈하라의 도박 사실을 알고 송금했다면 연방법에 의해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리그 차원의 징계도 피할 수 없다. 사무국도 관련 사건 조사에 착수했고, 오타니가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 알아보고 있다. 메이저리그 규정 21조 (d)(3)에 의하면 선수, 심판, 구단 또는 리그 관계자나 직원이 불법 도박업체 또는 불법 도박업체의 대리인에게 베팅한 경우 커미셔너가 행위의 사실과 상황에 비춰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제재를 내릴 수 있다. 커미셔너 재량으로 징계가 가능한 사안이다.
미즈하라는 야구 이외 다른 스포츠에만 베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경우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제재는 벌금형으로 끝날 수 있다. 만약 야구에 베팅했다면 두 가지로 나뉜다. 다른 팀 경기에 베팅했을 경우에는 1년 자격 정지를, 소속팀 경기에 베팅했을 시에는 최고 수위 처벌인 영구 제명을 당하게 된다.
오타니 변호인 측에선 오타니가 피해자라는 주장을 하고 있고, 도박에 연루됐거나 묵인했다는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정황으로 봤을 때 오타니가 징계를 받을 가능성은 낮고, 설령 징계를 받더라도 벌금형으로 끝날 게 유력하다. 그러나 사무국의 조사를 받고, 외부로부터 의심을 받는 것 자체가 오타니에겐 무척 괴로운 일이다. 오타니는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인간적인 배신감이 크다. 오타니 대변인에 따르면 미즈하라는 다저스 선수단에 사과를 하는 순간까지도 오타니를 속였다. 지난 20일 개막전이 끝난 뒤 미즈하라는 마크 월터 구단주가 연 미팅을 통해 다저스 클럽하우스에서 선수단에 사과를 하며 자신이 도박 중독에 걸렸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 있었던 앤드류 프리드먼 다저스 야구운영사장은 “오타니가 미즈하라의 빚을 갚는데 도움을 줬다”는 말까지 했지만 정작 그 자리에서 오타니는 무슨 사정인지 몰랐다.
ESPN의 취재가 거듭되자 오타니 대변인 측과 이에 대해 의견도 나눈 미즈하라는 그러나 오타니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미리 솔직하게 밝히지 않았다. 선수단 앞에서 사과를 하는 순간에도 영어로만 말했기 때문에 오타니는 그 자리에서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지 못했다.
ESPN에 따르면 오타니는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클럽하우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물어봤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제야 자신의 계좌에서 돈이 빠진 것도 발견했다고 한다. 오타니 대변인은 “오타니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며 오타니가 이번 사건의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대변인 주장이 사실이라면 오타니는 미즈하라에게 배신당한 것도 모자라 기만까지 당한 것이다. 오타니가 2013년 일본프로야구 니혼햄 파이터스에 입단했을 때 처음 만난 미즈하라는 2018년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단순 통역을 넘어 개인 비서에 매니저 역할까지 수행한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훈련 보조부터 전력 분석까지 야구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곁에 늘 함께할 만큼 오타니가 믿고 의지했다.
미즈하라도 ESPN과 최초 인터뷰에서 오타니와 관계를 ‘형제’라고 표현하며 “아내보다 오타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미즈하라의 아내도 서울시리즈 개막전 때 오타니의 아내, 부모와 같이 관중석에 나란히 앉아서 응원했다. 가족들끼리도 무척 가까운 사이였으니 오타니가 느꼈을 인간적인 배신감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