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NC 다이노스 유니폼 소속으로 KBO리그 MVP를 차지했던 에릭 페디(31·시카고 화이트삭스)는 지난해 11월 시상식에서 한 남자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한 시즌 동안 통역으로 자신의 입과 귀가 되어준 한동희(29) 씨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한 것이다.
페디의 진심 표현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같은 보라스 코퍼레이션 소속 한국인 외야수 이정후(26)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입단한 뒤 통역사를 구할 때 한동희 씨를 추천한 것이다. 원래 이정후 측에선 메이저리그 통역 경험이 있는 경력직을 알아봤지만 페디의 추천을 받아 한동희 씨로 결정했다.
지난달 이정후의 미국 입국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합류한 한동희 씨는 통역뿐만 아니라 훈련 도우미 역할까지 하면서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다. 이정후의 곁에서 그가 최대한 야구에 집중할 수 있게 온힘을 다해 돕고 있다. 통역은 선수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한데 한 씨의 서글서글한 인상과 친절함은 구단과 미디어의 호평을 받고 있다.
한 씨는 “메이저리그는 내게 꿈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인연이 닿아 이렇게 왔다. 처음에는 페디가 추천해준 줄 몰랐다. 미국에 와서도 페디와 계속 연락하며 만나기도 했다. 너무 자주 연락을 해서 이제는 서로 답장이 늦어지고 있다. 이제는 페디가 내게 미국 생활적인 면에서 어떤지 물어보곤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어 한 씨는 “페디와 정후 모두 굉장한 선수들이라 내가 정말 복받았다고 생각하다. 실력도 좋지만 인성적으로 탁월한 선수들이다. 정후에게도 옆에서 보면서 정말 많이 배우고 있다. 선수들에게 먼저 웃으면서 다가가는 부분은 내가 채워줘야 하는데 스스로 먼저 채우고 있어 내가 일하는 데 있어 오히려 도움을 받는다”고 고마워했다. 이정후의 남다른 친화력으로 한 씨도 샌프란시스코 선수단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천안이 고향으로 초등학교-중학교 시절 7년간 캐나다 밴쿠버에서 자란 한 씨는 어릴 때부터 야구를 무척 좋아했다. 메이저리그 통산 601세이브를 거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전설적인 마무리투수 트레버 호프먼을 좋아해서 그의 세이브 기록 새고 다닐 정도였다.
2018년 평창올림픽 때 처음 통역 일을 시작한 한 씨는 2021~2022시즌 남자프로배구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를 거쳐 2022년 NC 다이노스를 통해 야구단에 첫발을 내딛었다. 2022년 NC 외국인 투수 웨스 파슨스, 맷 더모디를 거쳐 지난해 페디 통역을 맡았다.
한 씨는 “대학에 다닐 때 NC 운영팀에 계신 조민기 통역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영상을 보고 통역이 정말 멋있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어 관심을 가졌고, 통역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며 “스포츠 통역은 경기장 안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지만 밖에서 더 많은 도움을 줘야 한다. 일의 연장선으로 선수 가족을 케어하는 것도 중요하다. ‘왜 내가 이걸 해야 하지?’ 하는 순간 일을 못한다고 생각한다. 한 번 그렇게 불만을 갖는 순간 끝이 없다. 그런 생각 자체를 가지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통역을 넘어 페디의 친구가 되어주며 그의 성공을 지원한 한 씨. 페디의 추천으로 메이저리그 통역이라는 꿈도 이룬 그는 “난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다. 내가 잘해서 여기 온 것도 아니다. 정후가 KBO리그에서 워낙 잘해서 이런 기회가 운좋게 나한테 온 것이다. 감사한 일이다”며 앞으로 자신의 꿈에 대해서도 “이정후 선수의 완벽한 시즌”이라고 대답했다.
메이저리그에서 페디와 이정후의 맞대결이 이뤄질 수도 있다. 화이트삭스와 샌디에이고는 8월20~22일 오라클파크에서 3연전이 예정돼 있다. “둘 다 정말 잘됐으면 하는 바람”이라는 한 씨는 둘의 맞대결에 대해서 “아,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진짜 안 붙었으면 좋겠다. 붙으면 그날은 출근 안 하겠다”는 농담으로 두 선수에 대한 애정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