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의 낭만은 역시 차원이 다르다.
KBO리그의 유일무이한 부자(父子) 타격왕, MVP 수상 기록을 합작한 이종범(54) 텍사스 레인저스 코치와 이정후(26·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미국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메이저리그 시범경기에서 부자가 그라운드에서 서로 유니폼을 입고 만났다.
지난 2일(이하 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의 스코츠데일 스타디움에서 부자의 그라운드 만남이 깜짝 성사됐다. 텍사스 산하 마이너리그 지도자 연수를 받고 있는 이 코치가 예정에 없던 샌프란시스코전 시범경기 원정에 동행을 하게 된 것이다.
이날 텍사스 캠프지가 차려진 서프라이즈 스타디움에서 오전 코칭스태프 미팅 중 이 코치의 동행이 결정됐다. 이 코치의 아들이 샌프란시스코 빅리거 이정후라는 사실을 텍사스도 알고 있었고, 깜짝 만남을 위해 메이저리그 선수단과 함께 이동하도록 배려했다.
마이너리그 캠프에서 이 코치의 연수를 지원 중인 케니 홈버그 텍사스 수비 코디네이터가 제안했고, 월드시리즈 우승 4회에 빛나는 브루스 보치 텍사스 감독도 흔쾌히 동했다. 보치 감독은 “아버지와 아들이 야구장에서 만나는 것보다 더 특별한 경험은 없다”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나아가 보치 감독은 이 코치에게 경기 전 라인업 카드 교환도 맡겼다. 이 코치가 “배려에 감사하다”고 고마움을 표하자 “오늘은 당신이 감독이다”는 농담으로 기분 좋게 화답했다.
당초 이종범-이정후 부자가 서로 라인업 카드를 교환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경기 전 이 사실을 통보받은 이 코치도 “한국에선 코치들끼리 교환하는데…”라며 짐짓 놀란 기색이었다. 하지만 전달이 제대로 안 됐는지 샌프란시스코 코치가 홈플레이트에 나와 이 코치와 라인업 카드를 주고받고 악수를 했다. 이후 3루 덕아웃으로 돌아가던 이 코치는 1루측 샌프란시스코 덕아웃을 바라보며 못내 아쉬워한 모습이었다.
경기 후 이정후는 “(라인업 카드 교환 때) 수비 위치에 뛰어나가야 할 시간이었다”며 전달을 받았더라도 교환에 나서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텍사스 구단이 배려를 해주셔서 아빠가 온 것 같다. 한국 야구장에서 보던 것과 느낌이 달랐다. 미국에서,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아빠를 만나게 돼 신기했다”고 말했다.
같이 미국으로 건너와 매일 집에서 보는 아버지이지만 야구장에서 서로 유니폼을 입고 만난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천생 야구인인 이 코치는 “이게 시즌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이날 이정후는 맞은편 3루 덕아웃의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5회 중전 안타를 치고 나가며 시범경기 데뷔 후 3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이어갔다.
비록 이종범-이정후 부자가 직접 라인업 카드를 교환하는 장면까진 나오지 않았지만 풍성한 이야잇거리를 만들고 포장하며 감동을 주는 메이저리그식 낭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2022년 3월12일 시범경기에선 더스티 베이커 당시 휴스턴 애스트로스 감독이 50세에 얻은 늦둥이 아들인 워싱턴 내셔널스 내야수 대런 베이커와 홈플레이트에서 라인업 카드를 교환하며 포옹을 나누는 장면이 연출됐다. 샌프란시스코 시절 베이커 감독 밑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데이브 마르티네스 워싱턴 감독이 마련한 깜짝 이벤트였다. 당시 마르티네스 감독은 “난 베이커 감독을 좋아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함께한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 좋다”고 말했다.
같은 해 4월12일에는 쌍둥이 형제 투수가 라인업 카드 교환 위해 홈플레이트에서 만났다. 당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소속이었던 테일러 로저스가 샌프란시스코 소속의 동생 타일러 로저스와 만나 악수를 나누고 라인업 카드를 주고받았다. 당시 테일러는 “특별한 순간이었고, 좋은 사진도 남겼다. 축복받았다”며 기뻐했다. 시즌 후 테일러가 샌프란시스코와 3년 3300만 달러에 FA 계약하면서 쌍둥이 형제가 한 팀에서 뛰고 있다. 올해 샌프란시스코에 온 이정후의 동료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