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루키이기 때문에…”
‘바람의 손자’ 이정후(26·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1일(이하 한국시간) 메이저리그에서 처음으로 원정길에 올랐다. 샌프란시스코 캠프지가 있는 미국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의 스코츠데일 스타디움에서 이날 경기가 열린 솔트리버필즈 앳 토킹스틱까지 거리는 약 9km밖에 되지 않아 원정이라 하기에는 너무 가깝지만 그래도 첫 원정경기였다.
오전에 캠프지에서 훈련을 마친 이정후는 경기조에 포함된 선수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구장으로 이동했다. 그동안 홈에서 훈련과 경기를 소화하면서 개인 승용차로 출퇴근을 해온 이정후에겐 버스 이동이 미국에 와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정후는 “한국 버스 진짜 편한데…”라며 웃었다. 전국 8개 도시, 9개 구장이 있는 KBO리그 구단들의 원정시 이동 수단은 버스다. 밤새 먼 거리를 이동하는 등 시즌 내내 선수들이 긴 시간 머무는 곳이 버스 안이다. 구단들은 선수단의 안전과 안락한 휴식을 위해 버스에 많은 투자를 한다.
일반인보다 덩치가 큰 선수들의 체형에 맞춰 개조된 구단 전용 버스는 1열3석이 기본으로 좌석이 널찍널찍하다. 의자도 접이식 침대처럼 뒤로 완전히 젖힐 수 있다. 각 좌석마다 와이파이 단말기, TV, 냉장고, 콘센트, USB 포트, 라디오 수신기 등 각종 편의 시설도 최고급으로 세팅돼 있는 럭셔리한 공간이다.
국토 면적이 한국의 98배에 달하는 미국은 워낙 땅덩어리가 넓어 메이저리그 선수단은 구단 전세기 없이 이동이 불가능하다. 공항으로 이동할 때를 빼면 장거리로 버스를 탈 일이 거의 없다. 반면 마이너리그 선수단 버스는 장거리 이동시 비좁은 좌석으로 악명이 높다. 그래서 미국 선수들은 버스로 이동하는 것을 무척 불편하게 생각한다.
이날 이정후가 선수단과 함께 탄 버스도 일반 수준의 버스였다. 이정후는 “팀 동료들에게 한국 버스의 맛을 한번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면서 “선수들이 한국에선 원정을 어떻게 이동하냐고 물러보길래 버스 타고 간다고 하니 다들 놀라더라. 오늘 버스를 타보니 놀란 이유가 있었다. 선수들에게 한국 구단의 버스 사진을 보여주니 ‘이 정도면 다닐 만하겠다’고 하더라”며 웃음을 지었다.
메이저리그 시범경기 기간에는 베테랑 선수들이 원정경기에도 개인 차를 끌고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 4년차가 된 김하성(샌디에이고 파드리스)도 지난달 29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전 원정경기를 위해 통역과 함께 개인 차로 자유롭게 출퇴근했다.
6년 1억1300만 달러로 팀 내 야수 중 최고 몸값을 자랑하는 이정후도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밥 멜빈 샌프란시스코 감독이 이정후에게 시범경기 원정 이동 수단에 대한 의사를 물어봤지만 이정후는 불편한 버스를 택했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버스 타고 원정 이동을 한다. 루키이기 때문이다. 감독님께서 의사를 물어봤는데 버스를 타고 선수들과 같이 이동하겠다고 했다”고 밝혔다.
이미 샌프란시스코 간판 스타급 대우를 받고 있는 이정후이지만 메이저리그 첫발을 내딛은 루키 신분으로서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있다. 그는 “지금은 다시 루키로 시작해야 할 때다. 신인 때 마인드로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당장 어떤 특별 대우를 받는 것보다 선수단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이 중요하다. 조금은 불편할 수 있는 버스 이동이지만 이 역시 적응의 과정으로 여기고 있다.
멜빈 감독은 시범경기 기간 팀의 모든 구성원이 경기 전 필드에 도열해 국민의례를 하고, 덕아웃에서 최소 몇 이닝 동안 다 같이 경기를 보는 내규를 만드는 등 팀의 단합을 중요시하고 있다. 그런 멜빈 감독이 볼 때 스스로 특별 대우를 거부하고 팀 퍼스트에 나선 이정후가 예뻐보일 수밖에 없다. 이정후의 버스 이동 결정에 멜빈 감독도 작은 배려를 했다. 가족이나 친구가 오는 날 경기에 교체되면 먼저 퇴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줬다. 이정후는 “감독님께서 배려를 한 번 더 해주셨다”며 고마워했다.
한편 이정후는 이날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전에 1번타자 중견수로 선발출장, 3타수 2안타 1타점 1득점으로 활약했다. 애리조나 우완 선발 라인 넬슨을 상대로 1회 첫 타석부터 3구째 몸쪽 낮은 커브를 잡아당겨 우월 2루타로 첫 장타를 신고하더니 3회에는 첫 홈런 손맛을 봤다. 넬슨의 4구째 한가운데 몰린 94.7마일 (152.4km) 포심 패스트볼을 받아쳐 우중간 담장 너머 잔디에 타구를 보냈다. 발사각 18도 라인드라이브 타구로 시속 109.7마일(176.5km)로 빠르게 뻗어가더니 비거리 418피트(127.4m)까지 날아갔다.
지난달 28일 시애틀 매리너스전에서 ‘올스타 투수’ 조지 커비에게 1회 첫 타석부터 안타를 치며 3타수 1안타 1득점으로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렀던 이정후는 이날 멀티 장타로 존재감을 더 높였다. 2경기 성적은 타율 5할(6타수 3안타) 1홈런 1타점 2득점. 첫 홈런까지 쳤지만 이정후는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기쁜 것은 아니다. 시즌 개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좋은 타구 날린 것을 의미 있게 생각한다”며 “아직 2경기밖에 안 해서 뭐라 평가할 단계는 아닌 것 같다. (지난해 7월말 발목 수술 이후) 오랜만에 경기를 하고 있고, 또 메이저리그 와서 경기를 하는 게 매일매일 즐겁다. 아직 시범경기가 많이 남은 만큼 어떻게든 잘 적응할 수 있게 하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