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루타에 이어 홈런. ‘바람의 손자’ 이정후(26·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메이저리그 데뷔 첫 장타와 홈런의 희생양된 투수는 같은 1998년생 투수 라인 넬슨(26·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였다.
이정후는 1일(이하 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 솔트리버필즈 앳 토킹스틱에서 치러진 2024 메이저리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시범경기에 1번타자 중견수로 선발출장, 3회 우중월 솔로포로 첫 홈런 손맛을 봤다.
지난달 28일 시애틀 매리너스전에서 ‘올스타 투수’ 조지 커비 상대로 1회 첫 타석부터 우전 안타를 치며 3타수 1안타 1득점으로 신고식을 치른 이정후는 두 번째 경기가 된 이날 첫 장타에 이어 홈런까지 신고했다.
3타수 2안타 1타점으로 멀티히트를 장타 2개로 장식한 이정후의 시범경기 성적은 타율 5할(6타수 3안타) 1홈런 1타점 2득점. 이제 2경기밖에 치르지 않았지만 적응이라고 할 것도 없이 불방망이 휘두르면서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다.
이날 애리조나 선발투수는 우완 넬슨이었다. 2019년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전체 56순위로 지명된 그는 2022년 9월 빅리그 데뷔 후 지난해 첫 풀타임 선발 시즌을 보냈다. 29경기(27선발·144이닝) 8승8패 평균자책점 5.31 탈삼진 96개의 성적을 냈다. 빼어난 성적은 아니지만 애리조나 5선발로 풀타임 경험을 쌓은 투수로 평균 94.4마일(151.9km) 포심 패스트볼에 커터, 체인지업, 커브를 구사한다.
시범경기 첫 등판이었던 지난달 25일 콜로라도 로키스전에서 2이닝 2피안타 무사사구 5탈삼진 무실점 호투로 승리를 거둔 넬슨은 이날도 3이닝 2피안타(1피홈런) 무사사구 5탈삼진 1실점 호투로 승리했다. 유일한 실점이 이정후 상대로 맞은 홈런으로 안타 2개 모두 이정후에게 맞은 것이었다.
1회 첫 타석부터 이정후가 넬슨을 공략했다. 투스트라이크 불리한 카운트에 몰렸지만 3구째 몸쪽 낮게 잘 떨어진 81.6마일(131.3km) 커브를 기다렸다는 듯 잡아당겼다. 존을 벗어난 공이었고, 정타를 만들기 어려운 코스였지만 이정후의 컨택 능력은 남달랐다. 배트 중심에 맞혀 우익수 키 넘어가는 큼지막한 타구로 2루타를 만들어냈다. 타구 속도 99.7마일(160.5km).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3회 두 번째 대결에서도 이정후가 넬슨을 제압했다. 초구 몸쪽 높은 포심 패스트볼에 파울이 난 뒤 2~3구째 바깥쪽 낮게 떨어진 체인지업을 골라냈다. 이어 4구째 한가운데 들어온 94.7마일(152.4km) 포심 패스트볼을 통타, 우중간 담장 밖 잔디석으로 타구를 보냈다. 타구 속도 109.7마일(176.5km) 총알 타구로 발사각 18도 비거리 418피트(127.4m) 날아갔다.
등판을 마친 뒤 클럽하우스에서 취재진을 만난 넬슨에게 이정후 관련 질문도 나왔다. 샌프란시스코 담당 기자들이 넬슨을 찾아 직접 이정후에 대한 질문을 했다.
이에 넬슨은 “이정후에 대한 스카우팅 리포트 없이 상대했다. 이제 그가 아주 좋은 타자라는 것을 알았다”고 그의 타격을 인정했다. 애리조나는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내셔널리그(NL) 서부지구 팀으로 정규시즌 10차례 맞대결이 예정돼 있다. 넬슨으로선 이날 이정후에게 미리 예방 주사를 맞은 셈이다.
이정후를 일찌감치 개막전 1번타자로 공표하며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내내 칭찬을 거듭 중인 밥 멜빈 샌프란시스코 감독은 이날 경기 후에도 칭찬을 추가했다. 멜빈 감독은 취재진에 “이정후가 좋은 출발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나?”라며 되물으며 “패스트볼과 변화구 모두 잘 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날 경기만 해도 떨어지는 커브를 기술적으로 받아쳐 2루타를 만들어내더니 빠른 공도 홈런으로 장식하며 구종을 가리지 않고 공략했다.
이날 샌프란시스코 선발투수로 나선 ‘에이스’ 로건 웹도 이정후의 홈런을 보곤 놀랐다. 3회 이정후가 홈런을 쳤을 때 1루 덕아웃에 있었던 웹은 맞는 순간 홈런인 줄 몰랐다. 그는 “처음에는 홈런이 될 줄 몰랐는데 타구 속도가 빠르더라. 이정후를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계속 이렇게 치면 매번 홈런이 나올 것 같다. 그래서 이정후를 보는 게 항상 재미있다고 말한 것이다”며 웃음 지었다.
이정후 자신도 홈런이 될 줄 몰랐던 타구였다. 그는 “넘어갈 줄 몰랐다. 너무 잘 맞아서 탄도가 조금 낮았다. 우중간으로 가서 2루타나 3루타를 생각하고 열심히 뛰었는데 심판이 손을 흔들고 있어 그때 홈런인 줄 알았다”며 “첫 타석과 비슷하게 우중간으로 갔지만 풀스윙을 돌렸기 때문에 조금 더 잘 맞기는 했다. 뛰는데 ‘우와’ 소리가 들리고, 심판 콜을 보면서 ‘뭐야 넘어갔어? 뭐지?’ 그랬다”고 홈런 순간을 떠올렸다.
이정후는 스프링 트레이닝 초반부터 “파워도 있다”는 평가를 들었다. 팻 버렐 타격코치는 “우리가 이정후를 좋아하는 이유는 인플레이 타구 생산 능력도 있지만 그 안에 또 다른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담장 밖으로 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우리는 그걸 부추기고 싶지 않지만 이정후는 자연스럽게 장타를 칠 수 있다”고 의외로 장타력까지 갖춘 선수라고 평가했다.
시범경기 2경기, 5타석 만에 첫 홈런을 신고하면서 내부 평가와 기대가 전혀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이정후는 “작년에 발목 수술을 하고 오래 쉬었기 때문에 운동장보다 웨이트장에 더 많이 있었다. 작년 시즌 끝나자마자 10월말부터 웨이트를 시작했다. 연습할 때 힘이 많이 생겼다는 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메이저리그식 식단의 힘도 있었다. 이정후는 “미국에 와서도 구단에서 먹는 것을 잘 챙겨준다. 내 몸에 맞는 것, 운동할 때 먹는 것을 잘 챙겨 먹으면서 한다. 라인드라이브를 치자는 생각으로 하는데 그게 잘 맞으면 하나둘씩 넘어가는 것이다. 장타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정후는 데뷔전이었던 이틀 전 시애틀전에 이어 이날도 취재진의 관심을 받았다. 샌프란시스코 담당 기자들은 이정후가 6회 타석을 마치고 교체된 뒤 원정팀 클럽하우스로 이동했다. 이날 선발투수였던 웹을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뒤 장비를 챙기고 들어온 이정후를 기다렸다. 이날도 한국 취재진 포함 10명 가까운 인원이 몰리자 샌프란시스코 구단 홍보 직원은 클럽하우스 입구 앞쪽으로 안내했다.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내내 이정후를 향한 관심이 워낙 높다 보니 클럽하우스 문앞에서 하는 게 일상이 되고 있다.
다음은 이정후와 취재진이 나눈 일문일답.
-첫 홈런인데 기분이 어떤가.
▲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기쁜 건 아니다. 시즌 개막을 준비하는 과정이지만 좋은 타구를 날린 것을 의미 있게 생각하고 있다.
-94.7마일 포심 패스트볼을 공략해 홈런을 쳤는데 KBO와 구속 차이는.
▲ 구속 차이일 수도 있지만 구속이 비슷해도 공끝이 더 좋다고 느껴지는 투수들이 (미국에) 더 많다. 왜냐하면 모든 투수들의 신장이 다 크다. 높은 타점에서 날아와서 좋게 느껴지는 것도 있다. 코치님들이랑, 나 개인적으로 겨울에 훈련한 게 조금씩 나오고 있는 것 같아 기분 좋게 생각한다.
-홈런을 치고도 전력으로 달렸는데.
▲ 넘어갈 줄 몰랐다. 너무 잘 맞아서 탄도가 조금 낮았다. 우중간으로 가서 2루타나 3루타를 생각하고 열심히 뛰고 있었는데 심판이 손을 흔들고 있어서 그때 알았다.
-두 번째 경기를 치렀는데 여기 와서 적응하는 과정은 어떤지.
▲ 아직 2경기밖에 안 해서 뭐라고 평가할 단계는 아닌 것 같다. 오랜만에 경기를 하고 있고, 또 메이저리그에 와서 경기를 하는 게 매일매일 즐겁다. 아직 시범경기가 많이 남은 만큼 치르는 기간 동안 어떻게든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에이스 로건 웹 투구를 뒤에서 지켜봤는데 어땠나.
▲ 확실히 메이저리그에서 알아주는 싱커를 갖고 있는 투수다. 오늘 경기를 보면 알겠지만 그라운드볼이 많이 나온다. 웹이 나오는 날에는 외야에서 할 게 별로 없는 것 같다(웃음). 그런 부분에 있어 라이언 크리스텐슨 벤치코치님이랑 경기 중에도 많은 얘기를 나눴다. 웹이 나왔을 때 어떻게 수비를 해야 할지 대화를 많이 나눴다. 좋은 투수와 함께 뛰어서 영광이다.
-오늘은 헬멧이 고정돼 있었는데.
▲ 조금 세게 눌러 썼다. 맞춤형 제작 헬멧은 아직 못 받았다.
-헬멧이 떨어지지 않게 의식을 한 것인가.
▲ 혹시라도 뛰다가 공에 맞거나 하면 안 되니까 뛰면서도 고정시켰다. 여기 헬멧은 한국 것과 다르게 무겁다. 헬멧이 크다 보니 창도 앞이 길어서 투수 볼 때 시야도 안 보이는 게 있다. 칠 때 어쩔 수 없이 조금 창을 위로 올리고 쳐야 한다. 그래야 앞에 부분이 밑으로 안 내려가서 투수를 조금 더 잘 볼 수 있다. 빨리 맞춤 제작 헬멧이 왔으면 좋겠다
-계약할 때부터 헬멧과 관련해 구단과 이야기한 부분은.
▲ 없었다. (헬멧 벗겨짐이)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첫 타석에서 2루타를 만들어냈는데.
▲ 초구는 볼 생각이었고, 2구째를 칠 생각을 했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몸쪽에 슬라이더가 잘 들어와서 파울이 됐다. 투스트라이크가 됐는데 오늘도 똑같이 삼진 먹기 싫어서 컨택하자 했는데 중심에 맞아서 타구가 멀리 가더라.
-치기 어려운 코스였는데.
▲ 거의 볼이었다. 커브인가 그랬는데 중심에 맞히자는 생각으로 쳤다. 중심에만 맞으면 멀리 가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공을 중심에 맞히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다.
-두 번째 타석 홈런 상황은.
▲ 홈런 치기 전 1루 쪽으로 강한 파울 타구를 쳤는데 내가 좋았을 때 나오는 파울이다. 초구에 돌렸는데 거의 몸쪽에 엄청 깊게 들어온, 정말 잘 들어온 공이라고 치고 나서 느꼈다. 1루 쪽으로 강하게 파울을 쳤을 때 감이 나쁘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키움에서 야구했던 선수들은 다 안다. 내가 그쪽으로 파울을 치면 ‘얘가 지금 감이 좋구나’ 하는 걸 다 알고 있을 정도다. 내가 그쪽으로 강한 파울을 치면 그 근래에 타격 컨디션이 좋은 것이다. 이후에는 체인지업, 체인지업 봤는데 둘 다 볼이 됐다. 빠른 공을 던질 것 같아 준비를 빨리 했던 게 좋은 결과가 있었던 것 같다.
-베이스를 돌 때 무슨 생각을 했나.
▲ 아, 3루까지 뛰어야 하나?(웃음) 왜냐하면 탄도가 보셨다시피 첫 타석이랑 비슷해서 우중간으로 갔다. 풀스윙으로 돌렸기 때문에 조금 더 잘 맞긴 했다. 치고 나서 뛰는데 ‘우와’ 소리 들리고, 심판 콜을 보면서 ‘뭐야 넘어갔어?’ 그랬다. 뭐지? 그랬다.
-비거리가 127m까지 멀리 날아갔는데.
▲ (상대 투수) 공도 빠르고, 중심에 맞으면 그만큼 멀리 간다. 여기가 또 건조해서 멀리 날아가지 않을까?(웃음)
-키움 히어로즈에선 시범경기 성적이 안 좋았는데.
▲ 나도 그걸 의식하고 있다. (2017년) 신인 때 말고 시범경기에서 잘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다시 루키로 시작해야 할 때이고, 시범경기에서 잘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때 마인드가 다시 한 번 나왔다. 신인 때 시범경기를 엄청 잘했으니까 그때처럼만 하면 좋겠다 생각했다. 마지막에 아웃된 것도 잘 쳐서 좋았던 것 같다.
-마지막 타석에는 잘 맞았는데 시프트에 걸렸다.
▲ (메이저리그에) 그 정도 시프트가 남아있는 줄 몰랐다. 아예 시프트가 폐지된 줄 알았다. 치는 순간에 안타라고 생각했다. 3루수, 유격수 사이로 너무 잘 갔는데 거기 길목에 수비수가 있어서 ‘어? 시프트가 안 없어졌네’ 했다. 그 정도는 된다고 하더라. 유격수가 2루 베이스만 안 넘어가면 된다고 해서 ‘아 그렇구나’ 했다. 몰랐다. 오늘 알았다.
-크리스텐슨 벤치코치와 수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 로건 웹 같은 경우 투심, 싱커를 많이 던져서 땅볼이 많이 나온다. 코치님이 웹을 상대로 타자들이 어떻게 대응할 것 같냐고 해서 당겨치면 땅볼이 많이 나올 것 같다고 했다. 그럼 잘 맞았을 경우 무조건 상대 타자 반대편으로, 예를 들어서 우타자면 우중간, 좌타자면 좌중간으로 간다. 그렇기 때문에 안 맞을 경우 무조건 땅볼이니 잘 맞을 때를 대비해서 수비를 하자는 식으로 말했다.
-6회 교체 후 블레이크 세이볼과 타격폼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 내게 타격시 어떤 걸 신경쓰는지 물어봤다. 같은 우투좌타이니까 그런 장단점에 대한 것을 이야기했다. 우투좌타는 오른손잡이인 경우가 많으니까 오른손의 힘이 강할 수밖에 없는데 오른손이 빠르게 힘을 주려는 경우가 생겨서 오른쪽 어깨가 빨리 열리거나 몸이 쏟아져서 팔이 들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왼손을 많이 신경쓰려고 한다는 얘기를 했다.
-구단 내부에서 캠프 시작 후 장타에 대한 호평이 많았는데 바뀐 부분은?
▲ 바뀐 건 없다. 2020년 시즌을 기점으로 2루타도 많이 치면서 장기적으로 중장거리 타자가 되고 싶었다. 연습 때부터 항상 풀스윙을 돌리곤 했다. 2022년에는 그게 최고조로 올라왔다. 2023년에도 타구 속도는 나쁘지 않았는데 발사각이나 이런 게 시즌 초반 안 좋아 장타가 많이 없었다. 개인적으로 연습할 때는 힘이 많이 생겼구나 이런 걸 많이 느낀다. 작년에 (발목) 수술을 하고 오래 쉬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운동장보다 웨이트장에 더 많이 있었다. 작년 시즌이 끝나자마자 10월말부터 웨이트 시작했다. 미국 와서도 먹는 것을 구단에서 잘 챙겨준다. 내 몸에 맞게, 운동할 때 먹는 것도 챙겨주는 것을 먹으면서 한다. 라인드라이브를 치자고 생각하는데 그게 잘 맞으니까 하나둘씩 넘어간다. 사실 장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시범경기 원정은 처음인데 구단 버스를 타고 이동한 느낌은.
▲ 한국 버스였으면 진짜 편한데 (미국은) 그렇지 않다. (팀 동료들에게 한국 버스를)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웃음). 선수들이 한국에선 원정경기 어떻게 가냐고 물어보니 버스 타고 간다고 하니 처음에 놀라더라. 놀란 이유가 있었다. (한국 우등) 버스 사진을 보여주니 ‘이 정도면 다닐 수 있겠다’고 하더라(웃음). 앞으로도 버스를 타고 원정 이동을 한다. 루키이기 때문이다. (밥 멜빈) 감독님이 내게 의사를 물어봤는데 버스 타고 이동하겠다고 했다. 감독님이 거기서 배려를 해주신 게 가족이나 친구 왔을 때는 경기에 빠졌을 때 먼저 가라고 해주셨다. 그래서 (경기 전) 출발할 때는 선수들과 같이 버스 타고 가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