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기는 밝고 맑으며 자발적이고 개방적이다”(19세기 프랑스 비평가 알베르 티보데)-
졸업과 입학, 마침과 시작 철이다. 학생들에겐 새로운 세계로의 동경과 꿈, 그리고 희망이 교차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아직 자신의 진로를 설계하기에는 이른, 나이 어린 초등학교 야구선수들로선 누군가의 알뜰한 이끎과 살뜰한 보살핌이 필요한 때이기도 하다.
그 노릇을 자청하고 나선 이만수 전 SK 와이번스 감독(66. 현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이야말로 ‘인도(引導)’의 적임자라고 할 수 있겠다. 초등학생과 그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그야말로 ‘열변’을 토해내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면서 든 생각이다.
한국 야구계에 살아 있는 ‘끝없는 열정의 화신’을 꼽는다면, SK 등 한국 프로야구 감독만 7개 구단에서 역임했던 김성근(82) ‘최강야구’ 감독과 이만수 이사장을 우선 들 수 있다. 김성근 감독이 여든을 넘긴 노령에도 여태껏 현장을 떠나지 않고 ‘줄기차게 일하는 지도자’라면, 이만수 전 감독(2016년 4월 28일에 설립한 열린 재단: Hulk Foundation 이사장) 야구 보급과 전수를 위해 국내는 물론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태국 등 야구 불모지였던 동남아 여러 나라에 야구의 싹을 심는, 이를테면 ‘야구 전도사’라 하겠다.
그런 이만수 전 감독의 ‘야구 사랑’ 봉사의 참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고 들을 기회가 생겼다. 서울 용산 남정초등학교 야구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재능기부 행사를 참관한 것이다.
지난 2월 24일, 영상 2도로 다소 쌀쌀한 날씨였던 오후 1시 20분께, 남정초등학교 교문을 들어서니 어린 야구선수들이 훈련하는 광경을 배경으로 운동장 앞 그물망에 내걸린 ‘KBO 레전드 이만수 감독님과 함께하는 야구 재능 교실’이라는 환영 플래카드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행사를 주선한 그 학교 올해 졸업생 홍례구(덕수중 1)의 아버지 홍종화(출판사 민속원 대표) 사장에게 연락하니 이미 이만수 감독이 도착했다는 전갈이었다.
야구부 선수들의 사물함이 있는 남정초 야구부 생활관에 들어서니 시작 예정 시각 오후 2시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온 이만수 감독이 앉은뱅이책상을 앞에 놓고 스무 명 남짓한 학부모들과 함께 둘러앉아 열심히 얘기하는 중이었다.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고 한쪽에 앉아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날, 이만수 이사장이 학부모들에게 한 ‘진로 상담’의 내용은 ‘젊은 선수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주제로 내세운 ‘29가지’ 직업이었다. 특별한 격식, 격의 없이 학생들의 진로에 대한 평소 소신과 생각을 마치 노래하듯이 술술 엮어냈다. 이만수 이사장 스스로 그동안 각층의 선수들의 의견과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작성, 정리해 놓은 29가지의 길에 대한 열쇠 말(키워드)을 학부모 대표에게 건네 하나하나 운을 띄우면 자신의 오랜 경험을 섞어 설명하는 형식으로 진행했다.
그가 갈무리한 그 키워드(야구선수 출신들이 할 수 있는 일) 29가지를 참고삼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스카우터 2. 전력분석원, 3. 트레이너, 4. 협회 행정가, 5. 프런트, 6. 매니저, 7. 지도자(프로 또는 아마추어 ), 8. 멘탈 코치. 9. 대만이나 중국 용병(선수), 10. 통역, 11. 통계(세이버메트릭스) 관련), 12. 심판, 13. 야구용품 연구 및 그 연관된 일(예. 배트, 글러브, 볼, 스파이크, 유니폼 등), 14. 그라운드 키퍼, 15. 야구장 운영, 16. 해설자, 17. 독립리그(선수), 18. 기록원, 19. 프로야구 응원 단장, 20. 불펜 포수, 21. 유투버, 22. 교수, 23. 체육선생, 24. 소프트볼 지도자, 25. 구단 단장, 사장, 26. 스포츠 마케팅, 27. 에이전트, 28. 야구 전문기자, 29. 일기 및 야구일지 그리고 야구 전문 책 만들기.
그의 단순명료한 설명은, ‘야구선수가 앞으로 이렇게 여러 가지 많은 일을 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절로 들게 했다.
이만수 이사장은 현역 때나 지도자 시절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쓰고 야구일지를 작성한 사실에 곁들여 야구 전문 책과 관련해서는 가까운 후배인 고려대 야구선수 출신 강인규가 자신의 경험을 소재 삼아 소설로 엮어낸 『스트라이크 아웃 낫 아웃』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이만수 이사장은 그와 더불어 자신이 하고 싶은 33가지를 또한 키워드로 풀어서 설명했다. 그 가운데는 이미 실천한 것도 있으나 ‘돈벌이 수단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야구아카데미 설립’이나 ‘나의 20년 프로젝트-웨이트트레이닝장 및 수영장을 갖춘 야구장 4면 짓기’-같은 구상 중인 것도 있었다.
1시간 이상 1차 설명회를 마친 이만수 이사장은 자리를 남정초 강당으로 옮겨 이번엔 훈련을 끝낸 남정초 재학생(3~6학년)들과 졸업생들 앞에서 심도 있는 강연(굳이 강연이라기보다는 설명)을 이어갔다.
그는 먼저 학생들에게 물었다. “부모님이 시켜서 야구를 시작했는가, 또는 야구를 하고 싶어 시작했는가”를. 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야구를 하고 싶어서”라는 물음에 일제히 손을 들었다. (개중에는 주뼛주뼛하는 학생도 있기는 했다)
어린 학생들은 이만수 이사장의 열띤 강연에 때로는 수굿하고 때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열중해 들었다. 스스로 ‘새벽형 인간’이라고 말한 그는 자신이 재능을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닌 후천적 노력 형이라며 선수 시절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훈련한 일화도 들려줬다.
"한양대 재학 때 만난 아내와의 데이트도 새벽 5시부터 시작했다"는 그가 결혼 약속 때 “아들 아홉 명을 낳아 야구팀을 꾸리려던 계획이 두 명밖에 안 돼 포기했다”는 농담에는 좌중이 웃음바다가 됐다.
학생들의 질문, “야구를 잘하려면”, “현역 시절 가장 까다로웠던 투수”,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투수”에 대한 그의 답변은 “연습밖에 없다, 최동원, 김시진”이었다.
“최동원 선배가 아니었다면 통산 3할은 넘었을 것”이라는 그의 설명에는 좌중의 웃음이 뒤따랐다. (이만수의 프로야구 16년 개인 통산 타율은 .296)
이만수 이사장은 3시간에 걸친 행사에 막판에는 “이젠 목이 아프다”며 마무리 짓고는 학부모들이 준비한 야구공과 책(『한국야구의 탄생)』에 선수들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해가면서 전혀 귀찮은 기색조차 없이 사인해줬다.
올해 들어 책을 무려 22권이나 읽었다는 그가 “학생들이 읽을 만한 책을 소개해달라”는 학부모의 요청에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를 추천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학생, 학부모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난 다음 헤어질 때 학부모들에게 건넨 작별 인사는 “존경합니다”였다.
그의 인사말이 단순히 입에 발린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날 그의 ‘무료 재능기부 행사’에 참석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했을 터였다. “(자신의 말뜻을 학생들이) 당장 이해는 못하더라도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그의 말에 일부러 시간을 내가며 어린 학생들을 위한 자리를 기꺼이 받아들인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유쾌, 통쾌, 상쾌한 재능기부 행사가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글/사진. 홍윤표 OSEN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