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마일 파이어볼러보다 이정후(26·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향한 시선이 더 뜨거웠다. 샌프란시스코 담당 기자들도 ‘바람의 손자’에게 제대로 꽂혔다.
이정후는 지난 28일(이하 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의 스코츠데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4 메이저리그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시범경기에 1번타자 중견수로 데뷔전을 가졌다. 경미한 옆구리 통증으로 첫 3경기를 쉬었던 이정후에겐 이날이 메이저리그 공식 데뷔 무대였다. 샌프란시스코 팬들은 물론 미디어의 시선도 이정후에게 집중됐다.
기대에 부응하듯 이정후는 1회 첫 타석부터 시애틀의 ‘올스타 투수’ 조지 커비 상대로 투스트라이크 불리한 카운트에서 3구째 몸쪽 변화구를 잡아당겨 우전 안타로 포문을 열었다. 그린라이트를 부여받고 2루로 연이어 과감한 주루 플레이를 펼치며 상대 배터리를 흔들었고, 수비 실책까지 유도했다. 이어 라몬테 웨이드 주니어의 중전 안타 때 홈을 밟아 첫 득점까지 올렸다.
2회 1루 땅볼, 4회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난 이정후는 시범경기 데뷔전을 3타수 1안타 1득점으로 마쳤다. 4~5회 주축 선수들이 교체된 뒤 시작된 현지 취재진의 클럽하우스 인터뷰 때에도 이정후에게 시선이 쏠렸다.
사실 이날 경기에는 샌프란시스코의 또 다른 FA 영입 선수도 데뷔했다. 파이어볼러로 유명한 우완 투수 조던 힉스(28)도 이날 샌프란시스코 선발로 데뷔 첫 등판을 했다. 결과는 1⅔이닝 2피안타(1피홈런) 1볼넷 4탈삼진 2실점. 1회 미치 가버에게 투런 홈런을 맞긴 했지만 최고 100마일(160.9km) 강속구를 뿌리며 삼진 4개를 잡았다.
취재진은 클럽하우스 안에서 힉스와 먼저 인터뷰했다. 힉스는 “1회에는 조금 흥분했던 것 같다. 생각한 것보다 조금 더 세게 던졌고, 스피드건을 보니 98~99마일이 나와 조금 흥분한 채로 던졌다. 1회에 30구까지 던진 것은 아쉽지만 전체적으로 괜찮았다”고 첫 등판 소감을 밝혔다.
힉스의 인터뷰가 끝난 뒤 덕아웃에서 클럽하우스로 들어온 이정후에게 현지 취재진의 시선이 향했다. 샌프란시스코 구단 홍보팀은 클럽하우스 안이 아니라 입구 쪽으로 10명 넘는 취재진을 안내했다. 클럽하우스 내부 공간이 협소하기도 했지만 이정후를 향한 관심이 워낙 집중되다 보니 다른 선수들을 배려한 조치이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를 담당하는 현지 취재진도 이정후에게 질문을 쏟아냈고, 경기 후 주요 기사의 메인으로 그를 다뤘다. 힉스 소식도 빠지지 않고 전했지만 이정후 분량의 반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6년 1억1300만 달러를 들인 이정후와 4년 4400만 달러에 영입한 힉스와 몸값 차이 만큼 관심도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 ‘MLB.com’은 ‘샌프란시스코의 새로운 중견수는 1회 5득점의 발판이 된 안타를 치면서 테이블 세팅 능력을 보여줬다. 커비의 공을 우전 안타로 만들어내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첫 안타를 기록, 6418명의 관중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고 전했다.
지역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도 ‘이정후는 2022년 KBO리그 MVP를 수상했지만 지난 시즌 막판 두 달 동안 거의 모든 경기에 결장했다. 7월에 발목 수을 받은 뒤 두 달을 결장했지만 이날 시범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 바람의 손자라는 별명대로 좋은 스피드를 갖고 있고, 시범경기에서 도루를 적극적으로 시도할 것이라 말했다’고 보도했다.
또 다른 지역지 ‘머큐리뉴스’도 ‘이정후와 힉스가 다른 형태의 스피드를 뽐냈다. 팀이 그들에게 왜 1억6000만 달러에 가까운 금액을 투자했는지 보여주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며 ‘바람의 손자라는 별명을 가진 이정후는 주루를 할 때 베이스를 날아다녔다. 그의 헬멧도 같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며 동양인 두상에 맞지 않는 헬멧이 자꾸 벗겨진 모습을 비중 있게 전하면서 같은 문제를 겪었던 한국인 내야수 김하성(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이름도 언급했다. 김하성은 지난해 중반 맞춤 제작한 헬멧을 받았고, 이정후도 같은 회사에 주문한 헬멧을 기다리고 있다.
밥 멜빈 샌프란시스코 감독도 이날 이정후의 이름이 나오자 “매우 흥분된다”며 “오래 기다렸다. (옆구리 통증으로) 조금 지연됐지만 첫 타석부터 안타를 치고 득점을 하는 모습이 꽤 좋아 보였다”고 말했다. 이어 이정후의 주력에 대해서도 “확실히 스피드가 있다. 작년에는 발목 부상을 당해서 조금 조심한 것이 있지만 우리가 본 그는 주력이 좋다. 앞으로 주루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보겠다. 상대에 어떤 혼란을 줄지 알 수 없다. 그 역시 공격적인 주루 플레이를 원한다”고 기대했다.
이정후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미국에선 첫 경기이지만 개인적으로도 7개월 만의 경기인데 그것 치곤 나쁘지 않았다. 긴장은 생각보다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말 왼쪽 발목 신전지대 손상으로 수술을 받고 재활한 이정후는 키움 히어로즈 소속이었던 지난해 10월22일 시즌 마지막 홈경기 삼성 라이온즈전에 8회 대타로 한 타석 소화했지만 팬들에게 인사하는 고별 무대로, 공수주 모두 정상 소화한 것은 지난해 7월22일 사직 롯데 자이언츠전 이후 거의 7개월 만이었다. 캠프에 와서도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페이스를 끌어올리는 데 집중한 그는 “몸 상태 좋다. 관리를 잘해주셔 아픈 데 없다. 좋은 타이밍에서 잘 쉬어서 완벽하게 나았던 것 같다”고 옆구리 상태도 자신했다.
이어 그는 1회 첫 타석 안타에 대해 “포문을 연 것에 대해 좋게 생각하는데 앞으로 경기가 많이 남았다.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면서 잘 적응해야 할 것 같다”며 과감한 주루 플레이에 대한 물음에 “감독님, 코치님도 그린라이트를 주셨다. 나도 많이 뛰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오늘도 내가 그냥 뛴 거였다. 시범경기부터 많이 뛰어보려고 한다”며 “오랜만에 뛰어서 하체가 중간에 풀리는 느낌은 있었는데 그런 건 경기 뛰면서 밸런스 찾아갈 거라 생각한다. 마지막 타석에 들어갔을 때는 또 오랜만에 뛰다 보니 하체가 안 잡히는 기분이 들더라. 지면에 딱 박혀서 단단하게 있어야 하는데 조금 떠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건 경기 감각이 부족해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한다. 시범경기 많이 남았으니까 그런 것들을 잡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물론 앞으로 적응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공에 조금 더 익숙해져야 한다. 그는 KBO리그와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차이점에 대한 현지 기자의 질문에 “변화구 스피드”라고 답하며 “확실히 다른 것 같다. 직구는 말할 것도 없고, 변화구 스피드가 다르다. (4회 삼진을 당한 공도) 잘 모르겠다. 스플리터는 아닌 것 같은데 브레이킹이 조금 있었다. 이제 한 경기 한 거라 앞으로 투수들을 더 상대해봐야 어떤 느낌인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외야 수비에 있어서도 너무 밝은 햇볕이 적응 과제다. 그는 “하늘이 너무 높게 있는 느낌이 들고, 너무 밝다. 한국에서 미국 전지훈련 왔을 때도 그 부분이 조금 힘들었다. 팝플라이가 떴을 때 공이내려오는 거리 감각 확보가 한국보다 힘들다. 그것도 내가 이겨내야 한다. 미국은 낮경기도 많으니 내가 다 적응해야 할 부분이다”고 말했다.
멜빈 감독은 이정후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시범경기에서 성적에 신경쓰지 안고 최대한 적응하길 바랐다. 이정후도 “지금은 잘하고 못하고도 중요하지만 적응하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경기 나갔을 때 내가 해야 할 것만 생각하면서 적응하는 데 포커스를 두겠다”며 “여긴 메이저리그이고, 한국이 아니다. 못 치게 되는 상황이 더 많을 수 있겠지만 지금 기간에는 성적보다 적응하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스윙도 많이 돌려보고, 아웃도 많이 되고, 안타도 많이 쳐보고 싶다”고 의지를 드러냈다.
한편 이정후는 29일 애리조나주 메사의 호호캄 스타디움에서 열린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원정경기에는 결장하며 하루 쉬어갔다. 샌프란시스코는 오클랜드에 4-7로 패하며 시범경기 3패2무를 기록, 첫 승을 또 미뤘다. 샌프란시스코는 3월1일 스코츠데일의 솔트리버필드 앳 토킹스틱에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상대로 시범경기 첫 승을 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