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첫 타석부터 안타. 올스타 투수를 상대로 인상적인 신고식을 치른 '바람의 손자' 이정후(26·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메이저리그에 힘찬 첫발을 내딛었다.
이정후는 28일(이하 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의 스코츠데일 스타디움에서 치러진 2024 메이저리그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시범경기에 1번타자 중견수로 선발출장, 1회 첫 타석부터 우전 안타를 터뜨리며 3타수 1안타 1득점을 기록했다. 6년 1억1300만 달러 거액을 받고 샌프란시스코에 온 슈퍼스타의 기분 좋은 스타트다.
아주 경미한 옆구리 통증으로 시범경기 첫 3경기를 건너뛴 이정후는 이날 4번째 시애틀전에 1번타자 중견수로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정규시즌은 아니지만 시범경기도 메이저리그 공식 경기로 인정된다. 아직 미국 무대에서 한 번도 뛰어보지 않은 이정후가 베일을 벗으면서 샌프란시스코 팬들과 미디어의 관심이 집중됐다.
첫 타석부터 안타를 치고 공격적인 주루로 첫 득점까지 올리며 강한 인상을 남긴 이정후는 나머지 두 타석에선 각각 1루 땅볼,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특히 4회 마지막 타석에선 보기 드물게 두 번 연속 헛스윙으로 삼진을 당하며 메이저리그의 수준 높은 공을 확인했다. 이 역시 이정후에겐 시즌을 준비하고 적응하는 과정이다.
이정후가 처음 맞딱드린 메이저리그 투수는 우완 조지 커비(26). 2019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20순위로 뽑힌 유망주 출신으로 빅리그 데뷔 2년차였던 지난해 31경기(190⅔이닝) 13승10패 평균자책점 3.35 탈삼진 172개 WHIP 1.04로 활약하며 올스타에 선정됐다. 이정후도 이날 경기 전 "상대 선발이 좋은 투수라고 들었다. 좋은 투수 공을 쳐볼 생각에 설렌다"며 "영상을 찾아보니 수직 무브먼트가 굉장히 좋아 보였다. 하이 패스트볼을 치면 좋은 결과가 안 나올 것 같다. 딱 봐도 너무 좋아 보였다"고 말했다.
그런 커비를 상대로 이정후는 첫 타석부터 안타를 폭발했다. 초구 패스트볼의 스트라이크 통과를 지켜본 이정후는 2구째 변화구에 배트를 냈다. 살짝 빗맞은 타구가 3루 쪽 파울이 되면서 투스트라이크 불리한 카운트에 몰렸지만 3구째 86마일(138.4km) 몸쪽 슬라이더를 받아쳐 우전 안타로 연결했다. 시애틀 1루수 타일러 라클리어가 몸을 날려 캐치를 시도했지만 이정후의 타구는 우측으로 빠져나갔다.
1루에 나간 뒤 리드 폭을 크게 가져가며 상대 배터리를 흔든 이정후는 누상에서 움직임도 활발했다. 그린라이트로 직접 2루로 뛰었지만 타이로 에스트라다가 파울을 치면서 1루에 되돌아간 이정후는 볼카운트 2-2에서 다시 한 번 스타트를 끊었다. 에스타라다의 유격수 땅볼 때 이미 2루에 거의 도달하면서 병살을 막는 듯했다. 시애틀 유격수 라이언 블리스가 포구 실책을 범해 타자 주자도 살았지만 이정후의 공격적인 베이스러닝이 병살을 방지할 수 있었다. 2루에 진루한 이정후는 라몬테 웨이드 주니어의 중전 안타 때 2루에서 빠르게 홈을 파고들어 팀의 첫 득점도 올렸다. 이정후의 안타를 시작으로 패트릭 베일리의 만루 홈런까지 터지며 샌프란시스코가 1회에만 5득점 빅이닝을 만들었다.
경기 후 이정후는 커비를 상대한 느낌에 대해 "좋은 투수를 만나서 상대를 했다는 게 개인적으로 좋았다"며 "투스트라이크에 몰려서 가볍게 컨택하는 느낌으로 쳤는데 다행히 중심에 맞아 좋은 코스로 가면서 안타가 됐다"고 설명했다.
1루에서 주자로 나가 2루 도루 시도를 한 것에 대해서도 "그린라이트였다. 오랜만에 뛰어서 하체가 중간에 풀리는 느낌은 있었는데 그런 건 경기 뛰면서 밸런스 찾아갈 거라 생각한다. 마지막 타석에 들어갔을 때는 또 오랜만에 뛰다 보니 하체가 안 잡히는 기분이 들더라. 지면에 딱 박혀서 단단하게 있어야 하는데 조금 떠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건 경기 감각이 부족해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한다. 시범경기 많이 남았으니까 그런 것들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감독님, 코치님도 그린라이트를 주셨다. 나도 많이 뛰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오늘도 내가 그냥 뛴 거였다. 시범경기부터 많이 뛰어보려고 한다"고 공격적인 주루 플레이를 예고했다.
이정후는 2회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두 번째 타석을 맞이했다. 1회 투구 중 강판됐지만 시범경기 룰에 따라 2회 다시 마운드에 올라온 커비와 한 번 더 승부를 벌였다. 이번에도 초구는 스트라이크. 변화구를 지켜만 본 이정후는 2구째 몸쪽 낮은 변화구를 골라낸 뒤 3구째 패스트볼이 높게 벗어나며 2-1 유리한 카운트를 점했다. 이어 4구째 바깥쪽 변화구를 잡아당겼지만 1루 땅볼이 되며 첫 아웃을 당했다. 커비 상대로는 2타수 1안타.
4회 2사 1루 마지막 타석에선 헛스윙 삼진을 당했다. 도미니카공화국 출신 우완 카를로스 바르가스(25). 지난해 9월 확장 로스터 때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서 데뷔해 5경기(4⅔이닝) 구원등판하며 평균자책점 5.79를 기록한 투수로 지난해 12월 거포 3루수 에우제니오 수아레즈의 반대급부로 시애틀로 트레이드됐다. 커비에 비해 많이 알려진 투수가 아닌데 공이 꽤 날카로웠다. 볼카운트 1-2에서 4구째 93마일(149.7km) 몸쪽 낮게 꺾여 들어온 커터성 공에 배트가 헛돈 이정후는 바로 다음 공으로 89마일(143.2km) 몸쪽 낮은 공에 또 헛스윙했다. 이정후가 두 번 연속 헛스윙하는 것은 쉽게 보기 어렵다.
이정후는 4회 삼진을 당한 구종에 대해 "모르겠다. 슬라이더 같았는데 그 전에 스윙한 게 슬라이더였다. (삼진 당한 공은) 거의 6%밖에 안 던지는 공인 것 같은데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며 "경기 전 구단에서 투수 관련 데이터를 다 준다. 데이터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처음 보는 투수라 뭐뭐 던지는지 한번 보고 들어갔는데 거의 투피치 투수다. 마지막 던진 공은 잘 모르겠다. 스플리터는 아닌 것 같다. 브레이킹이 조금 있었다. 스플리터처럼 떨어진 공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날 경기는 TV 중계가 따로 잡히지 않았고, MLB.com 게임데이도 정상 작동하지 않아 투수들의 구속과 구종이 정확하게 공개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를 담당하는 현지 기자들은 이정후에게 KBO리그와 메이저리그의 차이점에 대한 질문도 했다. 이에 이정후는 “변화구 스피드”라고 답하며 “직구는 말할 것도 없고 변화구 스피드가 다른 것 같다”고 살짝 놀란 기색도 보였다. 커비는 물론 바르가스의 변화구도 속도가 있었다. 패스트볼뿐만 아니라 고속 변화구까지 이정후가 극복해야 할 과정이다.
밥 멜빈 샌프란시스코 감독은 시범경기부터 이정후에게 성적에 대한 압박감을 주지 않고자 한다. 이날 경기 전 현지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성적에 신경쓰지 말고 자기 모습만 보여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정후도 "감독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선수 입장에선 더 마음 편안할 수 있다. 그래도 잘 치면 좋겠지만 못 쳤을 때도 있을 것이다. 야구는 못 쳤을 때가 더 많다. 여긴 메이저리그이고, 한국이 아니다. 못 치게 되는 상황이 더 많을 수 있겠지만 지금 기간에는 성적보다 적응하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스윙도 많이 돌려보고, 아웃도 많이 되고, 안타도 많이 쳐보고 싶다"고 남은 시범경기에 임하는 각오를 밝혔다.
이날 이정후가 5회 수비를 앞두고 교체되자 미국 현지 기자들도 경기 중 클럽하우스로 이동했다. 이날 시범경기 첫 등판에 나선 선발투수 조던 힉스(1⅔이닝 2피안타(1피홈런) 1볼넷 4탈삼진 2실점)와 인터뷰를 한 뒤 덕아웃에서 클럽하우스로 들어온 이정후를 둘러쌌다. 한국 취재진을 포함해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정후를 보기 위해 클럽하우스에 모였고, 공간이 협소하다 보니 라커 앞이 아니라 입구 쪽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음은 이정후와 취재진의 일문일답.
-첫 경기를 치른 소감은
▲ 미국에선 첫 경기이지만 개인적으로도 7개월 만의 경기인데 그것 치곤 나쁘지 않았다. 생각보다 긴자이 되진 않았다.
-첫 타석에 안타를 쳤는데 어떻게 접근했나.
▲ 일단 좋은 투수였고, 또 투스트라이크에 몰려서 가볍게 컨택하는 느낌으로 쳤다.
-몸 상태는 어떤가.
▲ 느낌 좋다. 관리를 잘해주셔 아픈 데 없다. 좋은 타이밍에 잘 쉬어서 (옆구리가) 완벽하게 나았던 것 같다.
-1회 시작부터 팀이 5득점을 냈는데.
▲ 포문을 연 것에 대해 좋게 생각하는데 앞으로 경기가 많이 남았다.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면서 잘 적응해야 할 것 같다.
-샌프란시스코가 앞으로 어떻게 좋아질 것 같나.
▲ 그건 나보다 마이클 콘포토나 마이크 야스트렘스키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난 신인이고, 잘 모른다. 내 할 것부터 열심히 해야 한다(웃음).
-작년에는 도루가 많지 않았는데 올해는 어떻게 될 것 같나.
▲ 감독님, 코치님도 그린라이트를 주셨다. 나도 많이 뛰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오늘도 내가 그냥 뛴 거였다. 시범경기부터 많이 뛰어보려고 한다.
-KBO리그와 메이저리그의 차이점을 느낀 게 있다면.
▲ 변화구 스피드다. 확실히 다른 것 같다. 직구는 말할 것도 없고, 변화구 스피드가 다른 것 같다.
-첫 상대 투수로 커비를 만난 느낌은 어땠나.
▲ 좋은 투수를 만나서 상대했다는 게 개인적으로 좋았다.
-경기 중 헬멧이 자꾸 벗겨지는 모습을 보였는데 새로 구해야 하나.
▲ 헬멧이 너무 크다. (김)하성이형처럼 자꾸 벗겨지는데 형 사이즈로 가져다 준다고 해서 오더한 게 있다. 특수 제작한 것을 그대로 하나 준다고 했다.
-볼카운트 2-2에서 뛰는 것도 그린 라이트였는지, 발목 부상에 대한 걱정은 없나.
▲ 그린라이트였다. 부상에 대한 걱정은 없다. 오랜만에 뛰어서 하체가 중간에 풀리는 느낌은 있었는데 그런 건 경기를 뛰면서 밸런스를 찾아갈 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타석에 들어갔을 때는 또 오랜만에 뛰다 보니 하체가 안 잡히는 기분이 들더라. 지면에 (발이) 딱 박혀서 단단하게 있어야 하는데 조금 떠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건 경기 감각이 부족해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한다. 시범경기가 많이 남았으니까 그런 것들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 안타 순간을 돌아보면.
▲ 투스트라이크라서 어떤 공을 노릴 수 없었다. 컨택하자는 생각으로 쳤는데 다행히 중심에 맞아서 좋은 코스로 가 안타가 됐다.
-4회 헛스윙 삼진을 당할 때 공은 어떤 공이었나.
▲ 모르겠다. 슬라이더 같았는데 그 전에 스윙한 게 슬라이더였다. 그건 거의 6%밖에 안 던지는 공이라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스윙을) 돌렸는데 그 공인 것 같았다. 지금은 시범경기이고, 다 쳐보고 싶어서 막 내고 있다. 좋은 투수들 공을 친 것 같아 앞으로가 기대된다.
-메이저리그 투수 공을 쳐보니까 어떤 느낌인가.
▲ 한 경기한 거라 아직 잘 모르겠다. 조금 더 해보면 말씀 확실히 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첫 경기이고, 아직 너무 오랜만에 뛰다 보니까 잘 모르겠다.
-경기 전 상대 투수 구종 관련 자료를 나눠주나.
▲ 데이터를 다 주신다. 데이터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4회 상대한 바르가스는) 처음 보는 투수라 뭐뭐 던지는지 한번 보고 들어갔다. 거의 투피치 투수였는데 마지막 던진 공은 잘 모르겠다. 스플리터는 아닌 것 같다. 브레이킹이 조금 있었다. 스플리터처럼 떨어진 공은 아니다.
-직접 필드를 나가서 경기를 뛰어본 느낌은.
▲ 긴장되거나 그런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없었다. 그냥 똑같이 했던 것 같다. 지금은 잘하고 못하고도 중요하지만 적응하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경기에 나갔을 때 내가 해야 할 것만 생각하면서 적응하는 데 포커스를 두겠다.
-멜빈 감독은 시범경기 기간 기록은 보지 않는다고 했는데.
▲ 감독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선수 입장에선 더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다. 잘 치면 좋겠지만 못 쳤을 때도 있을 것이다. 야구는 못 칠 때가 더 많다. 여긴 메이저리그이고, 한국이 아니다. 못 치게 되는 상황이 더 많을 수 있지만 지금 기간에는 성적보다 적응부터 하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스윙도 많이 돌려보고, 아웃도 많이 되고, 안타도 많이 쳐보고 싶다.
-외야 수비를 할 때 시야는 괜찮나.
▲ 너무 밝다. 하늘이 너무 높게 있는 느낌이 든다. 한국에서 미국에 전지훈련을 왔을 때도 그 부분이 조금 힘들었다. 연습경기 때 팝플라이 상황이 오면 공이 떠서 내려오는 거리 감각을 찾는 게 한국보다 힘들다. 그것도 내가 이겨내야 한다. 미국은 낮경기도 많으니 내가 다 적응해야 할 부분이다.
-내일(29일) 고우석(샌디에이고도 시범경기 데뷔하는데.
▲ 다치지 않고 잘 했으면 좋겠다. (서로 통화를 안 한다고?) 서로가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웃음). 자기 할 거 바쁘다. 누가 누구를 신경쓰기 어렵다.
-아침부터 응원해주는 한국 팬들에게 한마디.
▲ 새벽인데도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하다. 앞으로 좋은 모습 보여드릴 수 있도록 잘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