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이 다른 선수가 됐다.”
아시아 내야수 최초로 골드글러브를 수상한 김하성(28·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스승 염경엽(56) LG 트윈스 감독도 제자를 인정했다. 11년 2억8000만 달러 대형 FA 계약을 체결한 ‘거물’ 잰더 보가츠(32)를 1년 만에 2루로 밀어내며 유격수 자리에 복귀한 김하성을 두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18일(이하 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 LG 스프링캠프에서 취재진을 만난 염경엽 감독은 “하성이는 이제 메이저리그 선수다. 작년에 자리를 잡았다. 급이 다른 선수가 됐다”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샌디에이고는 지난 17일 스프링 트레이닝 전체 소집 첫 날을 맞아 김하성과 보가츠의 포지션 스위치를 알렸다. 마이크 쉴트 샌디에이고 감독은 “지난해 보가츠는 우리 팀 유격수로 좋은 활약을 했지만 유격수로서 김하성 가치를 인정했고, 좋은 팀 동료로서의 모습을 보여줬다”며 보가츠의 동의를 얻어 김하성의 유격수 복귀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몸값 10배 차이, 11년 장기 계약자를 1년 만에 밀어냈다
1년 전과 완전히 반대 상황이다. 지난해 이맘때 김하성은 유격수 자리를 내놓고 2루로 이동했다. 2022년 내셔널리그(NL) 유격수 부문 골드글러브 최종 후보에 오르며 톱클래스 수비력을 보여줬지만 FA 시장에서 샌디에이고가 실버슬러거 5회의 ‘거포 유격수’ 보가츠를 11년 2억8000만 달러에 영입하면서 밀렸다. 김하성이 유격수에서 2루수로, 제이크 크로넨워스가 2루수에서 1루수로 연쇄 이동했다.
돈의 논리로 움직이는 메이저리그에서 받아들여야 할 조치였다. 메이저리그는 돈이 곧 기회이며 선수 가치로 직결된다. 몸값이 높은 선수일수록 안정된 입지 속에 여러 가지 우선권을 갖는다. 그런데 2021년 1월 샌디에이고와 4+1년 보장 2800만 달러에 계약한 김하성이 1년 만에 자신보다 몸값이 10배나 비싼 보가츠를 실력으로 밀어냈다. 11년 장기 계약자가 1년 만에 유격수라는 프리미엄 포지션을 내놓을 만큼 김하성의 수비 가치가 높았다. 돈의 놀리를 실력으로 깨부순 것이다.
김하성은 지난해 주 포지션 2루수뿐만 아니라 3루수, 유격수까지 넘나들며 절정의 수비력을 뽐냈다. NL 2루수, 유틸리티 부문 골드글러브 2개 부문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2루수 부문은 니코 호너(시카고 컵스)에게 내줬지만 유틸리티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152경기 타율 2할6푼(538타수 140안타) 17홈런 60타점 83득점 38도루 출루율 .351 장타율 .398 OPS .749로 타격까지 발전한 김하성은 샌디에이고 야수 중 최고 생산력을 뽐냈다. 베이스볼레퍼런스 기준 WAR 5.8로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5.5)를 넘어 팀 내 1위였다.
반면 보가츠는 155경기 타율 2할8푼5리(596타수 170안타) 19홈런 58타점 83득점 19도루 출루율 .350 장타율 .440 OPS .790으로 예년에 비해 타격 성적이 떨어졌다. 수비 지표도 썩 좋지 않았다. 지난해 평균 대비 아웃카운트 처리 지표인 OAA는 +3으로 평균 이상이었지만 수비로 실점을 막아낸 DRS는 -4로 평균 이하였다. 나쁘지 않지만 크게 좋지도 않은 수비력이고, 샌디에이고 구단은 고심 끝에 팀을 위한 결정으로 김하성을 유격수로 복귀시켰다.
“수비는 보가츠보다 김하성이 낫다” 스승 염경엽 감독
김하성의 유격수 복귀 소식을 접한 염경엽 감독은 “수비로 보면 하성이가 보가츠보다 낫다. 보가츠가 (유격수로서) 엄청 잘하는 수비는 아니다”면서 “하성이는 이제 메이저리그 선수다. 작년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급이 다른 선수가 됐다”고 말했다.
김하성은 야탑고를 졸업하고 지난 2014년 2차 3라운드 전체 29순위로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에 지명됐다. 당시 염 감독이 팀을 이끌고 있었고, 고졸신인 김하성을 1군 스프링캠프에 데려갓다. 그해 1군 백업으로 60경기를 뛰게 하며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둔 강정호의 다음 유격수로 준비시켰다. 2015년 20살 나이에 주전 유격수가 된 김하성은 순식간에 빠르게 KBO리그를 대표하는 유격수로 성장했다.
KBO리그 시절 유격수로서 엄청난 장타와 타격 재능을 뽐낸 김하성이지만 염감독은 늘 수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염 감독은 “하성이가 처음 와서는 수비 기본기 훈련을 오래 했다”며 “메이저리그에 처음 갔을 때도 하성이한테 가장 처음으로 한 말이 ‘첫 번째가 수비다. 방망이는 그 다음’이라는 것이었다. 야구는 똑같다. 한국, 미국, 일본 모두 수비를 잘하면 쉽게 못 뺀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나다. 수비 하나로 2군에 한 번도 안 가고 10년 동안 딱 하고 끝냈다. 수비 잘하는 선수는 이기는 경기에 써야 하기 때문에 못 뺀다”고 이야기했다.
김하성은 2021년 메이저리그 첫 해 타율 2할2리(267타수 54안타) 8홈런 34타점 OPS .622에 그쳤지만 내야 전천후 수비력 인정받아 117경기를 뛰었다. 수비가 되는 선수이기 때문에 타격 적응 과정에 있어 샌디에이고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보면서 기회를 줄 수 있었다.
염 감독은 “수비가 되면 기회가 오게 되고, 그러다 보면 기회가 손에 잡히게 된다. 하성이도 수비가 안 됐으면 방망이 못 칠 때 벌써 갔어야 했다. 그런데 왜 샌디에이고가 못 보내겠나. 결국 수비가 되기 때문에 여기저기 쓸 수 있었던 것이다”고 이야기했다.
이정후가 본 최고 유격수도 김하성 "한국서 수비 저평가"
김하성을 뒤따라 메이저리그 데뷔를 앞둔 이정후(25·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도 유격수로서 그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다. 지난 2017~2020년 KBO리그 히어로즈에서 김하성과 한솥밥을 먹은 이정후는 18일 스코츠데일 스타디움에서 “하성이형은 어디든 수비를 다 잘하지만 내가 어릴 때부터 봤던 자리가 유격수라서 그런지 유격수가 제일 잘 어울린다. 내가 본 유격수 중 수비를 제일 잘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이정후는 KBO리그 시절 김하성의 수비력이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돌아봤다. 그는 “한국에선 하성이형이 방망이를 워낙 잘 치다 보니 수비가 저평가된 것이 있었다. 유격수로서 타격이 워낙 좋아 수비 얘기가 별로 나오지 않았다. 고척돔을 쓰는 것을 감안하면 수비도 하성이형이 제일 잘했다”고 강조했다.
인조잔디로 된 고척돔은 타구 속도가 빠를 뿐만 아니라 그라운드 흙도 딱딱해 바운드도 크게 튀어오른다. 내야수들이 가장 수비하기 어려운 구장으로 악명 높다. 김하성도 과거 “고척돔은 수비하기 진짜 어려운 구장이다. 고척돔에서 수비해본 선수라면 전부 다 그렇게 느낄 것이다. (샌디에이고 홈구장) 펫코파크도 타구 속도가 빠른 편이지만 그라운드 관리가 잘 돼 있다. 메이저리그 구장들은 그라운드 자체가 한국보다 관리가 좋아 수비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2016~2020년 5년간 김하성은 고척돔 홈 342경기에서 실책 56개를 범했다. 원정 349경기에서 기록한 실책 36개보다 20개나 많은 수치. 이정후 말대로 고척돔 영향 속에 한국에선 그의 수비력이 저평가된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진출 후 수비력으로 먼저 인정받았고, 아시아 최초 골드글러브 내야수로 우뚝 섰다.
이제 김하성은 내달 20~21일 서울에서 열릴 LA 다저스와의 개막 2연전, MLB 월드투어 서울 시리즈에 메이저리거로 고척돔 잔디를 다시 밟는다. 서울 시리즈 준비를 위해 고척돔은 지난해 11월부터 노후된 인조잔디를 폐기하면서 그라운드 정비 작업을 진행 중이다. 김하성은 달라진 환경 속에 4년 만에 고척돔 그라운드를 밟는다. 금의환향으로 서울 시리즈의 주인공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김하성은 “고척돔에서 유격수로 뛰는 것이 기대된다. 서울에서 메이저리그 경기를 치르는데 그게 고척돔이라서 내게 더욱 좋다. 익숙한 곳이기도 하고, 조금 묘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다. 한국팬들 앞에서 메이저리그 유니폼 입고 뛰는 것 자체가 설레고 기대된다. 한편으로는 부담감도 있긴 한데 한 달 정도 남아있기 때문에 준비 잘해서 한국팬들께 좋은 모습 보여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예비 FA 포지션별 최고 선수, 김하성은 유틸리티 부문 선정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 ‘MLB.com’도 지난 18일 2024시즌 후 포지션별 최고 FA 선수들을 꼽으면서 유틸리티 부문에 김하성을 지목했다. 올해 유격수로 복귀했지만 지난해 유틸리티로 NL 골드글러브를 수상한 김하성에 대해 MLB.com은 ‘김하성은 2루수나 유격수 자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는 어디서든 정상급 수비력을 보여줬고, 2루수로 이동한 지난해 첫 골드글러브를 수상했다. 2024년 다시 유격수로 돌아가지만 3루에서도 뛸 수 있다. 현 시점에서 2025년 어느 팀이 김하성을 어떤 포지션으로 영입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유틸리티 부문에 뽑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하성은 수비뿐만 아니라 타격도 좋아지고 있다. 타구 속도 95마일 이상 하드 컨택 타구를 많이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2023년 타율 .260 출루율 .351 장타율 .398로 준수한 슬래시라인을 기록했다. 또한 삼진이 줄고, 볼넷이 늘면서 평균 이상 타자가 됐다. 게다가 새로운 규정 환경 속에 도루도 38개나 기록했다’며 타격과 주루에서도 김하성의 가치가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지난 2021년 1월 샌디에이고와 4+1년 보장 2800만 달러, 최대 3900만 달러에 계약한 김하성은 내년 상호 옵션 800만 달러 계약이 남아있다. 양측에서 모두 동의를 해야 실행되는 계약으로 샌디에이고 구단에선 당연히 동의하겠지만 김하성이 거부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몇 년간 고액 장기 계약을 남발한 데다 중계권을 가진 방송사 파산 문제로 주요 수입이 끊기 샌디에이고는 페이롤 감축으로 긴축 재정에 나서 연장 계약도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소 1억 달러가 기본으로 유격수 자리에서 가치를 높이면 2억 달러를 바라보는 것도 꿈은 아니다.
중앙 내야수가 부족한 FA 시장 상황도 김하성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예비 FA 2루수 호세 알투베가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5년 1억2500만 달러에 연장 계약하며 일찌감치 잔류했고, 14년 3억7780만 달러에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연장 계약을 체결한 바비 위트 주니어도 트레이드 시장에 나오지 않는다.
MLB.com이 뽑은 예비 FA 최고 유격수는 윌리 아다메스(밀워키 브루어스)인데 그 외에는 김하성과 견줄 만한 경쟁자가 보이지 않는다. 김하성과 같은 1995년생 유격수로 장타력이 뛰어나지만 전반적인 타격 생산성과 수비에 있어 지난해 김하성이 조금 더 우위였다.
여러 가지 상황이 김하성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지만 그는 샌디에이고 잔류 의사가 강하다. “샌디에이고가 너무 좋다. 비즈니스이기 때문에 팀 사정이 그렇다면 다른 데 가야겠지만 떠나기 싫다. 다른 팀에 가면 ‘샌디에이고 팬들처럼 나를 이렇게 좋아해줄까’ 하는 생각이 크다”고 속내를 밝혔다.
샌디에이고가 물밑에서 연장 계약을 제안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영입 1년 만에 보가츠를 2루수로 옮기고, 유격수 유망주 잭슨 메릴을 외야수로 준비시키는 등 일련의 상황은 샌디에이고가 김하성과 장기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FA가 아닌 연장 계약으로 합리적인 수준의 오퍼가 온다면 잔류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waw@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