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FA 유격수 잰더 보가츠(32) 영입 실패를 사실상 인정했다. 김하성(28)을 새 시즌 주전 유격수로 내세우면서 보가츠의 자리를 2루로 옮겼다. 몸값 차이가 무려 10배나 나지만 김하성이 실력으로 거물 스타를 밀어냈다.
마이크 쉴트 샌디에이고 감독은 지난 17일(이하 한국시간) 미국 피오리아의 피오리아 스포츠 컴플렉스에서 치러진 2024 샌디에이고 스프링 트레이닝 폴스쿼드 훈련 첫 날을 맞아서 김하성과 보가츠의 포지션 변경을 알렸다.
이날 훈련 전 클럽하우스에서 김하성이 한국 취재진에게 “아시게 되겠지만 포지션 변동 사항이 있다”며 입가에 흐르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 이유가 바로 유격수 복귀였다. 이날 아침 쉴트 감독은 보가츠와 김하성을 차례로 만나 포지션 변경을 알렸다. 보가츠에게 동의를 구한 뒤 김하성에게 통보를 했다.
1년 전과는 반대 상황이 됐다. 지난해 이맘때 김하성은 유격수에서 2루수로 포지션이 바뀌었다. 2022년 내셔널리그(NL) 유격수 부문 골드글러브 최종 후보에 오를 만큼 수비력을 인정받았지만 샌디에이고가 FA 시장에서 ‘거포 유격수’ 보가츠를 11년 2억8000만 달러에 깜짝 영입하면서 자리를 내놔야 했다. 김하성이 유격수에서 2루수로, 제이크 크로넨워스가 2루수에서 1루수로 연쇄 이동했다. 돈의 논리로 움직이는 메이저리그 생리상 당연했다.
메이저리는 돈이 곧 기회이고, 선수 가치로 직결된다. 몸값이 높을수록 안정된 입지 속에 여러 우선권이 주어진다. 하지만 11년 장기 계약으로 데려온 선수를 1년 만에 유격수에서 2루수로 옮긴 샌디에이고는 투자 실패를 사실상 인정했다. 돈의 논리를 뒤집은며 팀을 위한 결정을 내렸다.
1년 만에 상황이 역전됐다. 김하성이 실력으로 돈의 논리를 깨부셨다. 지난해 주 포지션 2루수 외에도 3루수, 유격수까지 넘나들며 절정의 수비력을 뽐낸 김하성은 NL 유틸리티 부문 골드글러브를 받았다. 152경기 타율 2할6푼(538타수 140안타) 17홈런 60타점 83득점 38도루 출루율 .351 장타율 .398 OPS .749로 타격까지 일취월장하면서 팀 내 야수 중 최고 생산력을 뽐냈다. 베이스볼레퍼런스 기준 WAR 5.8로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5.5)를 넘어 1위.
반면 보가츠는 155경기 타율 2할8푼5리(596타수 170안타) 19홈런 58타점 83득점 19도루 출루율 .350 장타율 .440 OPS .790으로 예년에 비해 타격 성적이 떨어졌다. 수비 지표도 리그 평균에서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이었다. 샌디에이고 프런트는 냉정하게 판단했고, 전체적인 팀 전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포지션 변경을 결정했다.
김하성과 보가츠의 포지션 스위치가 발표된 17일 피오리아 캠프 현장에서 쉴트 감독은 최대한 보가츠에게 예우를 갖췄다. “보가츠는 지난해 우리 팀 유격수로 좋은 활약을 했다. 그는 유격수로서 김하성의 가치를 인정했고, 좋은 팀 동료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줬다. 보가츠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하늘을 찌른다”며 치켜세우며 포장했지만 실상은 밀려난 것이다.
이날 쉴트 감독으로부터 포지션 변동 이야기를 듣고 15초 만에 결정을 내린 보가츠도 김하성을 인정했다. 그는 “수비에 있어 김하성을 존경한다. 사실 그를 많이 존경한다. 그래서 (포지션 변경이) 나쁠 게 없다”고 말했지만 “이렇게 빨리 유격수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며 씁쓸함을 감추진 못했다.
김하성의 실력이 아니었더라면 보가츠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김하성은 유격수 복귀에 대해 “오늘 아침에 들었는데 깜짝 놀랐다. 갑자기 들어서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내가 계속해서 뛰어왔던 포지션이라 가장 편하다. 그만큼 팀에서 믿어준다고 생각한다. 더 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보가츠가 내게 양보 아닌 양보를 했다. 큰 결정을 했다고 생각한다. 분명 본인이 (유격수를)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할 텐데 팀이 원하는 방향성에 맞춘 것이다. 팀을 먼저 생각해서 팀을 위한 결정을 한 것 같다. 그만큼 나도 정말 잘 준비해야 한다”고 책임감을 나타냈다.
샌디에이고로선 리스크가 있는 선택이긴 하다. 미국 ‘폭스스포츠’는 ‘보가츠는 야구 역사상 9번째로 비싼 계약을 맺은 지 1년 만에 2루수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며 ‘유격수 자원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샌디에이고는 보가츠에게 그 이전 연장 계약(2019년 4월 보스턴 레드삭스와 6년 1억2000만 달러)보다 거의 두 배가 되는 계약 기간과 금액을 제안했다. 샌디에이고는 머지않아 유격수 숫자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2025년 상호 옵션이 있는 김하성은 시즌 후 FA가 될 것이다. 그러면 샌디에이고는 유격수에 대한 또 다른 결정을 해야 한다’고 짚었다.
만약 김하성을 잡지 못하면 샌디에이고의 유격수 얼굴은 내년 시즌 또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결정은 샌디에이고가 김하성과 장기적인 그림을 그리고 내린 결정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최근 들어 트레이드설이 잠잠해졌고, 김하성도 샌디에이고에 남고 싶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내비쳐왔다. 그는 “팀에 남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크다. 다른 팀에 가게 되면 샌디에이고 팬들처럼 나를 좋아해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즈니스라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샌디에이고에 남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