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2억8000만 달러(약 3740억원) 몸값을 자랑하는 거포 유격수를 밀어냈다. 김하성(28)과 잰더 보가츠(31)가 포지션을 맞바꿨다. 올해부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키스톤 콤비는 ‘2루수 보가츠-유격수 김하성’으로 스위치됐다.
마이크 쉴트 샌디에이고 감독은 17일(이하 한국시간) 미국 피오리아의 피오리아 스포츠 컴플렉스에서 열린 2024 샌디에이고 스프링 트레이닝 폴스쿼드 훈련 첫 날을 맞아 김하성과 보가츠의 포지션 변경을 발표하며 “팀을 우선시한 결정이다”고 밝혔다.
지난해 이맘때 김하성은 유격수에서 2루수로 포지션을 옮겼다. 거포 유격수 보가츠가 11년 2억8000만 달러 대형 FA 계약을 맺으면서 김하성이 주 포지션을 내줬다. 그런데 1년 만에 김하성이 유격수로 돌아가면서 보가츠를 밀어낸 모양새로 상황이 역전됐다.
FA 이적 1년 만에 유격수 자리 내놓은 보가츠
쉴트 감독은 “보가츠는 지난해 우리 팀에서 유격수로 좋은 활약을 했다. 팀에 긍정적인 역할을 해줬다. 하지만 보가츠는 유격수로서 김하성의 가치를 인정했고, 좋은 팀 동료로서 모습을 보여줬다. 보가츠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최고조에 달했다”고 포지션 변경을 수락한 보가츠를 예우했다.
보가츠의 포지션 변경은 FA 계약 당시부터 논의된 부분이다. 지난해 시즌을 마친 뒤 김하성과 포지션 스위치에 대한 이야기가 내부에서 논의된 것이 언론에 나왔고, 새 사령탑인 쉴트 감독이 총대를 멨다. 지난해 12월 보가츠의 고향인 네덜란드령 퀴라소 아루바를 찾아 포지션 변경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날 스프링 트레이닝 야수조 훈련 첫 날 아침 보가츠와 김하성에게 팀의 결정이 통보됐다. 보가츠는 “받아들이는 데 15초가 걸렸다”며 “내가 이곳에 온 유일한 이유는 월드시리즈 우승이다. 내가 2루로 가서 팀이 우승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꼭 우승하고 싶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보가츠처럼 몸값이 비싼 베테랑 선수가 포지션 변경을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팀을 생각했지만 김하성의 수비력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결정이다. 보가츠는 “수비적인 면에 있어 김하성을 존경한다. 그를 많이 존경한다”며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고, 이제는 유격수 자리를 떠나도 괜찮을 때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하성도 깜짝 놀란 아침 통보 "보가츠가 양보 아닌 양보"
김하성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오늘 아침에 (감독에게) 들었다. 깜짝 놀랐다”고 밝힌 김하성은 “갑자기 들어서 조금 당황하기도 하고, 부담도 되지만 내가 계속해서 뛰어왔던 포지션이라 가장 편하다. 그만큼 팀에서 믿어준다고 생각한다.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보가츠에 대한 예우도 잊지 않았다. 김하성은 “보가츠가 내게 양보 아닌 양보를 해줬다. 거기에 맞게끔 준비 잘해야 할 것 같다”며 “보가츠가 큰 결정을 했다고 생각한다. 분명 본인이 (유격수를)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할 텐데 팀이 원하는 방향성에 맞춘 것이다. 팀을 먼저 생각해서 팀을 위한 결정을 한 것이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난해 1년간 키스톤 콤비를 맞췄기 때문에 자리가 바뀌어도 크게 어려움은 없을 듯하다. 김하성은 “서로 위치는 바뀌었지만 보가츠는 수비 센스가 있는 선수다. 잘하는 선수이고, 유격수보다 2루수가 조금 더 편하기 때문에 금방 적응할 것이다”고 자신했다.
보가츠는 “2루수로서 피벗 플레이가 조금 어려울 것 같다. 유격수로 상대 주자를 바라보는 것에 익숙한데 이제는 옆에서 오는 선수를 봐야 한다. 그게 힘들 것 같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4번타자로 크게 칠 수 있는 2루수는 많지 않다”며 자신의 새로운 가치를 어필한 뒤 “3루수와 유격수로 한 번씩 우승을 했다. 2루에서 한 번 더 우승하면 정말 좋을 것 같다”고 기대했다.
보가츠는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두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 경험이 있다. 2013년에는 3루수로, 2018년에는 유격수로 뛰며 우승 반지를 손에 꼈다. 이제는 2루수 자리에서 유격수 김하성과 합을 맞춰 3번째 우승 반지를 바라본다.
유격수로 FA 시장 나간다, 김하성 초대박 계약 예고
2021년 메이저리그 데뷔한 김하성은 2년차였던 2022년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의 손목 부상과 금지 약물 징계로 풀타임 주전 유격수 기회를 얻었다. 150경기 타율 2할5푼1리(517타수 130안타) 11홈런 59타점 58득점 51볼넷 100삼진 12도루 출루율 .325 장타율 .383 OPS .708로 활약, 유격수 부문 내셔널리그(NL) 골드글러브 최종 후보에 올랐다.
이어 지난해에는 2루수로 포지션을 옮겨 152경기 타율 2할6푼(538타수 140안타) 17홈런 60타점 84득점 75볼넷 124삼진 38도루 출루율 .351 장타율 .398 OPS .749로 리그에서 주목할 만한 성적을 냈다. 2루수뿐만 아니라 3루수, 유격수를 넘나들며 NL 유틸리티 부문 골드글러브 수상으로 가치를 크게 높였다.
FA 시즌을 앞두고 유격수로 자리를 옮겼으니 가치가 치솟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시즌 후 FA 시장에서 주목할 만한 유격수 자원은 윌리 아다메스(밀워키 브루어스)밖에 없었다. 김하성과 같은 1995년생 유격수로 장타력이 뛰어나지만 전반적인 타격 생산성과 수비력은 지난해 김하성이 조금 더 우위였다. 시장 상황도 김하성에게 유리한 상황인데 이번 포지션 변경으로 일일 술술 풀리는 느낌이다.
FA 초대박을 위한 발판은 마련됐다. 이제 김하성이 기회를 잘 살리는 것만 남았다. 그는 유격수 복귀가 FA에 미칠 영향에 대해 “나한테 이득이 되는 것보다 팀이 좋은 성적을 내는 데 도움이 돼야 한다. FA는 내가 잘하면 알아서 따라오는 것이다. 내가 FA를 따라가면 분명 안 좋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동안 하던 것처럼 매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고 자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