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멜빈(62)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감독은 지난 2003년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시애틀 최고 스타가 일본이 낳은 천재 타자 스즈키 이치로(51)였다. 멜빈 감독은 2004년까지 시애틀을 이끌었는데 그해 이치로는 빅리그 단일 시즌 최다 262안타 신기록을 세웠다.
이치로의 최전성기를 눈앞에서 지켜본 멜빈 감독이 올해는 한국에서 온 천재 타자 이정후(25)와 함께한다. 멜빈 감독은 지난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남은 1년 계약을 상호 합의하에 해지한 뒤 샌프란시스코로 이적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정후가 6년 1억1300만 달러 대형 계약으로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었다.
"이치로 생각나지 않나?" 고개 끄덕인 멜빈 감독, 무엇을 봤나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수잔 슬러서 기자는 지난 15일(이하 한국시간) 멜빈 감독과 인터뷰 중 이정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이치로 이름을 꺼냈다. 타격에서 이치로가 연상되지 않느냐는 물음에 멜빈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선수 공통점을 설명했다. 20년간 4개 팀에서 통산 1517승을 거둔 명장 눈에는 무엇이 보였을까.
멜빈 감독은 “이치로가 조금 더 앞발에 의존하긴 하지만 둘 다 일관되게 공을 맞히는 방식에 이써 비슷한 점이 있다”며 “인플레이 타구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요즘처럼 삼진이 많은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특히 좌타자로 발이 빠르면 더 좋다. 강한 타구가 아니더라도 그라운드에 공이 들어가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같은 우투좌타 외야수로 장타보다 정확성에 중점을 두며 발이 빠르다는 점이 이치로와 이정후의 공통점이다. 당장 이정후가 이치로처럼 리그를 지배하는 활약을 보여주긴 어렵겠지만 그보다 2살 어린 나이에 왔다는 점에서 앞으로 성장을 기대할 만하다. 지난해부터 수비 시프트 제한, 베이스 크기 확대 및 피치 클락으로 컨택과 주력이 좋은 선수가 득세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이정후에겐 호재다.
아직 메이저리그에서 데뷔도 하지 않았지만 멜빈 감독의 신뢰는 대단하다. 벌써 3월29일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열리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정규시즌 개막전 1번타자로 낙점했다. “이정후가 개막전 리드오프가 아니라면 충격적일 것이다. 부상만 아니면 이정후가 개막전 선발로 나온다”며 미리 공표를 한 것이다.
이정후도 감독의 신뢰가 고맙기는 마찬가지. KBO리그 키움 히어로즈에서 7년을 뛰며 5번의 개막전 선발출장 경험이 있지만 3번타자로 4경기, 8번타자로 1경기를 나섰다. 개막전 1번타자를 해본 적이 없다. 이정후는 “개막전 리드오프는 태어나서 처음하는 것이다. 기대가 된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준비를 잘하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올스타 거포도 깜짝 놀란 이정후 타격 "운이 아닌 기술이다"
감독뿐만 아니라 동료 선수들의 이정후의 타격 기술을 인정하고 있다. 메이저리그 8시즌 통산 홈런 147개에 OPS .810을 기록 중인 올스타(2017년) 출신 거포 외야수 마이클 콘포토(30)는 이달 초부터 스코츠데일에서 이정후와 함께 운동하면서 그의 남다른 비범함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두 선수가 타격 훈련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이정후가 몸쪽 깊은 공에 몸이 빠지면서도 정확하게 컨택하는 모습에 콘포토가 놀랐다. 이전에 이정후 타격 영상에서 본 장면이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이정후의 타격 영상 중 유명한 것이 바로 이 묘기 스윙. 키움 소속이었던 2022년 6월18일 고척 LG전에서 3회 임찬규의 5구째 몸쪽 깊고 낮게 들어온 142km 직구에 두 다리가 빠진 채 우전 안타를 쳤다.
피하지 않았으면 몸에 맞는 공이 될 코스였고, 공을 피하면서 중심이 크게 흘렸지만 공을 끝까지 바라보고 놀라운 배트 컨트롤로 안타를 그야말로 만들어냈다. 타격 연습에서도 같은 모습이 나왔고 이정후는 “운이 좋았다”며 손사래를 쳤다. 이에 콘포토는 “아냐, 그건 기술이야”라고 답했다. “점프를 하면서 스윙을 하더라. 믿어지지가 않았다. 확실히 기술이다. 이정후의 영상을 몇 개 봤는데 그런 게 정말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콘포토는 이정후의 KBO리그 커리어를 존중하며 조언도 아끼고 있다. 그는 “이정후에게 많은 조언을 하지 않았다. KBO에서 훌륭한 커리어를 쌓은 선수다. 자신감을 잃지 말고 자신의 루틴을 잘 지키라는 말만 했다. 배팅 케이지에서 보여주는 그의 루틴은 정말 멋지고 세련됐다. 모든 훈련에는 목적이 있다. 그 루틴을 고수하고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이 리그에서도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줬다. 공을 맞히는 기술이 뛰어나 타율이 높고, 매우 빠르다. 타석에서 접근법도 좋은 점도 리그 적응에 있어 도움이 될 것이다”고 기대했다.
타격뿐만 아니라 수비와 주루에서도 이정후 효과를 기대한다. 주 포지션이 우익수인 콘포토는 “외야에서 훌륭한 수비력을 보여줄 것 같다. 내가 전력 질주로 다이빙해서 잡아야 할 타구를 (중견수) 이정후가 잡아줄 것이다. 덕분에 다리 상태도 건강하게 잘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이정후에게 영어 강요하고 싶지 않다, 편하게만 지내라" 멜빈 리더십
16일에도 멜빈 감독은 이정후에게 바라는 것에 대해 “동료 선수들과 편하게 지낼 수 있게 친해지길 바랄 뿐이다. 메이저리그를 배우는 과정은 어려울 수 있지만 동료 선수들과 코치들이 도와주면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적응도 더 빨라질 것이다”고 기대했다.
이정후는 선수단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유창한 영어 실력은 아니지만 선수들에게 먼저 다가가 농담을 건네며 가까워졌다. 이정후의 바로 옆 라커를 쓰는 콘포토도 “이정후를 알게 돼 정말 즐겁다. 그는 재미있고, 자신감이 넘치는 청년이다. 여기 와서 대부분 운동을 이정후와 함께했다. 라커도 바로 옆에 있어서 재미있게 지내고 있다. 그를 알면 알수록 매우 훌륭한 커리어를 쌓아갈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샌프란시스코 입단 때 서툴지만 영어로 자기 소개를 하며 화제가 된 이정후는 “듣는 것은 다 알아듣겠는데 대화가 아직 힘들다”고 말했다. 이정후의 영어 실력에 대해 멜빈 감독은 “통역사가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모든 것을 억지로 다 강요를 하고 싶진 않다. 나도 다른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안 했다. 이정후는 잘하고 있다”며 “다른 나라에 와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앞으로도 처음 겪어야 할 일들이 맗지만 이정후는 그런 문제를 잘 처리하고 있다”고 신뢰를 나타냈다.
2003~2004년 시애틀 매리너스, 2005~2009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2011~2021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2022~2023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거쳐 올해 샌프란시스코 지휘봉을 잡은 멜빈 감독은 올해의 감독상만 3회(2007·2012·2018년) 수상한 감독으로 선수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덕장형 감독이다. 20년 경력자답게 수많은 아시아 선수들과 함께했다.
처음 지휘봉을 잡았던 시애틀에선 스즈키 이치로, 사사키 가즈히로, 하세가와 시게토시, 오클랜드에선 마쓰이 히데키, 샌디에이고에선 다르빗슈 유, 김하성, 최지만이 멜빈 감독 밑에서 뛰었다. 아시아 선수들의 성공적인 리그 안착을 위해 실력만큼 야구장 안팎에서 생활적인 면에서 적응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정후가 이런 감독 밑에서 메이저리그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것은 행운이라 할 만하다.
멜빈 감독의 배려 속에 순조롭게 팀에 적응 중인 이정후는 16일 스코츠데일 스타디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달부터 이곳에서 개인 훈련으로 컨디션을 조절한 이정후에겐 첫 휴식이었다. 오는 20일 야수조를 포함한 샌프란시스코 선수단 전체 공식 소집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