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것은 다 알아듣겠는데 대화가 아직 힘들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첫발을 내딛는 이정후(25)에게 야구 다음으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영어 공부다. 야구 실력을 인정받고 미국에 왔지만 온 사방에서 영어를 쓴다. 지난해 KBO리그 NC 다이노스의 외국인 투수 에릭 페디의 통역을 맡았던 한동희 씨가 이정후의 통역으로 샌프란시스코에 합류했지만 선수들과 더 깊은 소통을 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영어 듣기와 말하기가 돼야 한다.
지난해 12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입단식에서 이정후는 영어로 자기 소개를 해서 화제가 됐다. 발음이 유창하진 않았지만 진심을 담은 한마디에 팬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유니폼을 입고 모자를 착용한 뒤 “핸썸?”이라고 영어로 농담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어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아직 대화가 원활한 수준은 아니다. 이정후는 “선수들이 쉽게 얘기해줘서 듣는 것들은 다 알아듣겠는데 대화가 아직 힘들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샌프란시스코 선수들이 ‘굿모닝’, ‘헬로’가 한국말로 뭔지 물어보면서 이정후가 편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만큼 이정후의 친화력이 좋기에 가능한 모습들이다.
어느 곳이든 말이 통해야 소통이 편해질 수 있다. 이정후에게 영어 공부도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지만 야구만큼 절대적 요소는 아니다. 밥 멜빈 샌프란시스코 감독도 그런 부분에서 스트레스를 주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하다.
멜빈 감독은 16일 미국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의 스코츠데일 스타디움에서 열린 스프링 트레이닝을 앞두고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이정후의 영어 실력에 대해 “통역사가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모든 것을 억지로 다 강요하고 싶진 않다. 나도 다른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안 했다. 이정후는 잘하고 있다”고 말했다.
멜빈 감독은 야구뿐만 아니라 경기장 안팎 생활에 있어서도 이정후가 최대한 편안함을 느끼길 바란다. 그는 “이정후가 동료 선수들과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친해지길 바랄 뿐이다. 메이저리그를 배우는 과정은 어려울 수 있지만 동료 선수들과 코치들이 도와주면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적응도 빨라질 것이라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이어 멜빈 감독은 “이정후는 다른 나라에 있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앞으로 처음 겪어야 할 일들이 많이 있다. 이정후는 필드 밖에서도 그런 문제를 잘 처리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의 적응력에 신뢰를 표했다.
2003~2004년 시애틀 매리너스, 2005~2009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2011~2021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2022~2023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거쳐 올해 샌프란시스코 지휘봉을 잡은 멜빈 감독은 올해의 감독상만 3회(2007·2012·2018년) 수상한 덕장형 감독으로 20년 경력자답게 수많은 아시아 선수들과 함께했다.
처음 지휘봉을 잡았던 시애틀에선 스즈키 이치로, 사사키 가즈히로, 하세가와 시게토시, 오클랜드에선 마쓰이 히데키, 샌디에이고에선 다르빗슈 유, 김하성, 최지만이 멜빈 감독 밑에서 뛰었다. 아시아 선수들의 성공적인 리그 안착을 위해 실력만큼 야구장 안팎에서 생활적인 면에서 적응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정후에게도 다른 것보다 야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자 한다. 2021년 데뷔 첫 해 극심한 스트레스로 원형 탈모에 시달렸던 김하성도 멜빈 감독이 부임한 2022년 주전 유격수로 뛰어오르더니 지난해 유틸리티 부문 골드글러브를 수상하며 팀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멜빈 감독의 믿음과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지난해 시즌 후 멜빈 감독이 샌프란시스코로 이적하자 김하성은 손수 장문의 편지를 써서 “당신이 나를 2년간 지켜줬다”는 내용의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멜빈 감독은 스프링 트레이닝 첫 날이었던 지난 15일 이정후를 정규시즌 개막전 1번타자로 일찌감치 못박을 만큼 절대적인 신뢰를 표하고 있다. 6년 1억1300만 달러 거액을 쓴 선수를 안 쓸 순 없지만 공개적으로 신뢰를 표하면서 이정후를 배려했다. 아시아 선수들을 잘 아는 베테랑 감독 밑에서 메이저리그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것도 이정후에게 행운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