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또 수술. 드래프트에도 3번이나 떨어졌지만 야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고향팀’ 한화 이글스에 입단한 외야수 김선동(24)이 육성선수 신화를 꿈꾼다.
대전 출신으로 어릴 때 한화를 보며 프로야구 선수의 꿈을 키운 김선동에게 야구는 시련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대전고 3학년 시즌 전 연습경기 중 발목을 다쳐 수술한 것이 첫 번째 시련이었다.
김선동은 “중학교 때 유급을 한 번 해서 1년 더 꿇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수술 후 재활을 두 달간 하고 무리해서 경기를 뛰었다. 급하게 하다 보니 성적도 안 나고, 신인 지명을 받지 못했다”고 떠올렸다.
그래도 크게 좌절하지 않았다. 성적이 안 좋았던 만큼 지명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고, 대학에서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 2년제 동강대로 진학하며 2022년 드래프트를 노렸다. 주말에도 안 쉬고 운동하며 야구에 전념했지만 또 부상이 찾아왔다. 수비 훈련을 할 때 어깨가 탈구된 뒤 참고 뛰었는데 2학년 때 경기 중 도루하다 다시 어깨가 빠졌다. 병원에서 수술을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또 한 번의 드래프트 낙방을 직감해야 했다.
“2년간 안 되면 그만둔다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 또 부상으로 한순간에 무너졌다. 부모님께서도 많이 슬퍼하셨다. 자꾸 다치니까 부모님도 ‘그만해도 된다’고 하셨다. 그때 야구를 그만둘 생각을 거의 다했는데 (수술로 인해) 군면제 대상이 됐다. 재활을 하고 한 번만 더 도전을 하기로 했다”는 게 김선동의 말이다.
원광대로 편입한 김선동은 재활을 거쳐 3학년 때 복귀했다. 1년 넘게 실전 감각이 떨어져 고전했지만 4학년이 된 지난해 잠재력을 폭발했다. 14경기 타율 3할4푼(50타수 17안타) 1홈런 12타점 7도루 13사사구 10삼진 출루율 .476 장타율 .540 OPS 1.106으로 활약했다. 중견수로서 공수주에서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김선동은 “후회 없이 해보자는 마음으로 야구를 즐겼다. 야구 자체를 즐기며 하다 보니 성적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2024년 드래프트에서도 김선동은 외면을 받았다. 11라운드까지 110명의 선수들이 지명됐지만 10개 구단 어느 곳에서도 그의 이름을 호명하지 않았다. 김선동은 “기대를 많이 했는데 끝날 때까지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안 되면 그만두겠다는 생각으로 4학년 시절 후회 없이 야구했고, 지명이 되지 않더라도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이름이 안 불리니 부모님 생각도 나고, 너무 속상했다”고 떠올렸다.
3번의 드래프트 미지명. 하지만 마지막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드래프트가 끝나고 2주가 흘러 한화에서 육성선수 테스트 기회가 왔다. 서산에서 열린 테스트 때 공수주에서 가진 모든 것을 보여줬고, 이날 저녁 바로 합격 통보를 받았다. 드래프트 지명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꿈꿔온 프로 입단의 꿈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그 팀이 한화라서 더 좋았다. 김선동은 “어릴 때부터 한화 팬이었다. 지금 코치님들이 선수로 뛸 때부터 한화를 응원하면서 봤다. 한화 선수라면 누구나 다 좋아했는데 강동우 코치님을 가장 좋아해서 1번타자 응원가를 많이 불렀다. 추승우 코치님, 고동진 코치님도 좋아했다”며 “송광민 대표님도 있다. 대표님 센터에서 어깨 재활을 했는데 많이 신경써주셔서 도움을 받았다”고 고마워했다.
육성선수이지만 일본 고치에서 진행 중인 퓨처스 스프링캠프에 합류한 김선동은 정확한 컨택 능력과 빠른 발, 중견수로서 폭넓은 수비 범위가 장점으로 평가된다. 그는 “캠프에서 내 장점을 잘 보여줘 코치님들 눈도장을 받은 뒤 1군에 한 번 올라가는 게 목표다. 시즌이 끝나면 1군 마무리캠프, 내년 스프링캠프도 따라가고 싶다”며 “프로까지 오는 과정이 힘들었지만 그 시간들이 나의 무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쉽게 좌절하지 않는 게 나의 장점이다. 끝까지, 끈질기게 살아남는 선수가 되겠다”고 말했다. /waw@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