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이다. 2006년 SK(현 SSG)의 1차 지명을 놓고 다퉜던 인천 연고 고교생들이 돌고 돌아 한화에서 배터리를 이루게 될지도 모르겠다.
한화는 28일 베테랑 포수 이재원(35)을 연봉 5000만원에 영입했다. 18년간 함께한 SSG의 보류선수명단에서 제외돼 야구 인생 기로에 섰던 이재원은 한화에서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 한화는 ‘한국시리즈 우승 등 경험이 풍부한 이재원을 영입해 최재훈, 박상언의 뒤를 받칠 백업 포수 자원을 확보하게 됐다’고 밝혔다. 경험이 중요한 포수 포지션의 특수성을 감안했다.
손혁 한화 단장은 “최재훈과 박상언 외에는 경험 있는 포수가 부족하고, 부상에 대한 대비와 뎁스를 강화할 필요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해 이재원을 영입했다”며 “유망주 허인서가 내년 시즌 후반기 상무에서 복귀할 때까지 이재원이 포수진에 무게감을 더해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인천고 출신 이재원은 2006년 1차 지명으로 SK에 입단한 유망주 출신이다. 당시 같은 연고 지역인 동산고 투수 류현진(36)도 SK의 1차 지명 후보로 거론됐다. 하지만 SK는 류현진 대신 대형 포수감 이재원을 택했다. 류현진은 고교 2학년 때 팔꿈치 인대접합수술을 받은 게 리스크였다.
이듬해 1차 지명 후보로 급부상한 안산공고 에이스 김광현이 있어 SK는 같은 좌완 류현진이 크게 절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신인 2차 지명에 나온 류현진은 1라운드 전체 2순위로 한화에 지명됐다. 1순위 지명권을 가진 롯데는 예상대로 광주일고 특급 사이드암 투수 나승현을 선택했다.
당시로선 합리적인 선택과 지명 순서로 평가됐지만 그 결과는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파급력이 컸다. 류현진은 2006년 데뷔 첫 해부터 MVP, 신인상을 동시 석권하며 괴물 투수 탄생을 알렸고, 2012년 종료 후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전까지 7년간 KBO리그를 지배했다. 나승현은 입단 첫 해 마무리로 활약했지만 2010년이 1군 마지막 커리어로 2015년 시즌이 끝난 뒤 은퇴했다.
이재원도 한동안 류현진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레전드 포수’ 박경완이 30대 후반까지 건재했고, 그를 뒷받침하던 정상호라는 수준급 포수까지 있다 보니 마스크를 쓸 기회가 없었다. 데뷔 초에는 좌완 투수 저격용으로 기용됐다. 좌투수 상대 선발과 대타로 3할대 고감도 타격 능력을 보였고, 2007·2008·2010년 SK의 3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에 일조했지만 류현진에 비하면 존재감이 미미했다.
하지만 박경완의 은퇴 이후 찾아온 포수로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014년 본격적으로 마스크를 쓰고 풀타임 주전으로 거듭났다. 그해 전반기 막판까지 4할대 타율로 절정의 타격 능력을 보인 이재원은 2015년 개인 한 시즌 최다 17홈런과 함께 100타점을 기록했다. 2010년 LG 조인성(107타점)에 이어 포수로는 역대 두 번째 100타점 시즌.
2018년에는 주장을 맡아 130경기 타율 3할2푼9리(407타수 134안타) 17홈런 57타점 OPS .919로 활약하며 SK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주전 포수이자 팀 주장으로 이끈 우승이라 의미가 더 컸다. 시즌 후에는 4년 69억원 FA 대박까지 쳤다. 무옵션 계약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FA 계약 이후 첫 해에만 어느 정도 활약했을 뿐 4년간 저조한 성적으로 기대에 못 미쳤다. 2022년 와이어 투 와이어 통합 우승 멤버로 함께했지만 개인적인 성적은 내세울 게 없었다. FA 자격을 재취득했지만 신청하지 않았다. 연봉이 10억원에서 1억원으로 깎이면서 절치부심했지만 올해는 1군 27경기 타율 9푼1리(44타수 4안타) 무홈런 2타점 OPS .242로 기여도가 거의 없었다.
SSG에선 사실상 전력 외 판정을 받았고, 현역 역장 의지가 강한 이재원은 구단에 방출을 요청했다. 1군에서 17년간 통산 1426경기 타율 2할7푼8리 1087안타 108홈런 612타점 OPS .762의 성적을 남기고 ‘원클럽맨’으로서 커리어를 포기했다. 비록 FA 계약 이후 성적이 급락한 게 아쉽지만 5번의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로 SK-SSG로 이어진 인천 야구 역사에서 꽤나 큰 족적을 남긴 선수였다.
이재원이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얻은 팀이 한화라는 게 흥미롭다. 한화는 올 겨울 메이저리거 류현진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다. 메이저리그에 무게를 두고 신중하게 거취를 고민 중인 류현진이지만 한화는 포기하지 않았다. 류현진은 구단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미국 잔류, 국내 복귀에 대한 큰 틀에서의 거취 결정을 빠르게 하고 싶어 하지만 한화 구단에선 따로 데드라인을 설정하지 않았다. “오기만 한다면 우리는 언제든 좋다”며 류현진이 부담을 갖지 않고 결정할 수 있게 소통하면서 기다리는 중이다. 그 시기가 1월이든, 2월이든, 아니면 3월 이후라도 한화는 준비가 돼 있다.
만약 류현진이 돌아온다면 SK 1차 지명을 놓고 다퉜던 이재원과 한솥밥을 먹게 된다. 어쩌면 투수와 포수로 함께 배터리를 이루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그동안 두 선수는 한 팀을 이룬 적이 없었다. 2006~2012년 류현진이 한화에 있을 때 상대로만 만났는데 총 34번의 맞대결에서 타율 3할2푼3리(31타수 10안타) 2홈런 3볼넷 8삼진으로 이재원이 강한 면모를 보였다. 이재원의 데뷔 첫 홈런도 류현진에게 뽑아낸 것이다. 지난 2007년 4월6일 대전에서 열린 시즌 개막전에서 이재원은 1회 류현진의 146km 몸쪽 직구를 받아쳐 좌측 담장을 넘겼다. 그렇게 엇갈렸던 류현진과 이재원의 인연이 한화에서 이뤄질 수 있을지 남은 겨울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