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백종인 객원기자] 천기누설이다. 이도류의 행선지가 초미의 관심사일 때였다. 묘한 소문이 돌았다. 백넘버에 대한 것이었다. 다저스가 투수 조 켈리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는 말이 돌았다. “등번호를 양보해 줄 수 있을까?”
그가 달고 있던 것은 17번이다. 대학(UC 리버사이드) 시절의 애착 번호다. 웬만해서는 뺏길 리 없다. 그걸 양해해달라고 요청한 셈이다. 그렇다면 상대는 보통 거물급이 아니다. 대단한 레벨의 17번, 답은 뻔하다. 옆집 에인절스에 그런 선수가 있다. 오타니 쇼헤이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공식 발표가 떴다.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뉴스다. 그리고 입단이 확정됐다. 다저 스타디움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포토 데이를 겸한 행사였다. 푸른 유니폼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등에는 숫자 17번이 선명하게 빛난다.
옷피셜이 뜨기 이틀 전이다. SNS 게시물 하나가 화제였다. 짧은 동영상은 한 여성의 등장으로 시작됐다. 여러 벌의 옷을 집 앞뜰에 펼쳐 놓는다. 마치 버리는 것 같다. 등번호 17이 새겨진 유니폼이다.
곧이어 남편이 나타난다. 뭔가 못마땅한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여성은 남성의 흰옷에 파란색 매직으로 이름과 숫자를 적는다. ‘KELLY 99’. 새로운 유니폼(?)이 완성됐다. 특이한 옷피셜의 주인공은 다저스 투수 조 켈리와 그의 부인 애슐리 켈리다.
나름 만만치 않은 투수다. 메이저리그 12년 차의 베테랑이다. 우승 반지만 2개를 가졌다. 그럼에도 35살에 백넘버를 교통 정리당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쿨한 반응이다. “사실 이제까지 누구에게도 17번을 양보한 적이 없다. 어릴 적부터 소중하게 여겼던 번호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영광으로 생각한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사람 아닌가. 미련 없이 넘겨주고, 그 번호와 작별했다.”
주변에서도 갈채를 보낸다. 멋지게 양보했다며 어깨를 두들긴다. 부인의 이벤트 역시 해학이 넘친다. 자신도 위트를 발휘한다. “이미 선물 리스트를 만들어놨다.” 보상을 잔뜩 바라는 눈치다. 왜 아니겠나. 멀리 KBO리그에서도 명품 시계를 선물할 정도다.
곁에서 지켜보는 동료도 키득거린다. 투수 워커 뷸러가 최근 한 팟캐스트에 출연했다. 여기서 깜짝 놀랄 얘기를 제보한다. “조(켈리)가 요즘 자동차 딜러 샵을 돌아다닌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혹시 슈퍼카? 그렇다면 수억대를 호가한다. 아무리 통 크고, 사람 좋은 17번의 새 주인이지만, 긴장해야 할 것 같다.
LA에서는 백넘버 17번을 두고 즐거운 놀이가 한창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허전함을 지울 수 없다. 하필이면 켈리가 새로 선택한 번호 때문이다. 우리에게 정들었던 99번이다.
사실 쟁탈전이 벌어질 정도의 인기 번호는 아니다. 오랜 다저스 역사에서도 단 2명만이 그 숫자를 달았다. 보스턴에서 온 매니 라미레스(2008~2010)가 처음이다. 그다음이 Ryu(2013~2019)였다. 이번 조 켈리가 세 번째 주인인 셈이다.
리그 전체로 보면 가장 큰 이름이 애런 저지(2016~2023년ㆍ양키스)다. 최근에는 타이후안 워커(2017~2023ㆍD백스, 매리너스, 메츠, 필리스)가 달고 있다. 아시아 출신으로는 내야수 다구치 소(2002~2009ㆍ카디널스, 필리스, 컵스)가 애정하던 번호다.
의외로 사용 빈도는 잦다. 올시즌 30개 구단 중에 13팀이 99번을 사용했다. 그런데 대개는 수명이 짧다. 5년 이상 달고 있는 선수는 많지 않다. Ryu(10년), 저지(8년), 워커(7년), 케이넌 미들턴(5년) 정도다. 그 아래가 알렉스 버듀고와 제임스 카린책(각각 4년)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1회용이다. 1년만 쓰고 바꾸는 번호다.
하지만 우리에겐 다르다. 왠지 눈길이 가는 숫자다. 대전에서부터 LA를 거쳐, 토론토까지. 긴 여정을 함께 했다. 벌써 17년이다.
아직은 구직활동에 여념이 없다. 아마도 이번이 미국에서는 마지막 직장일 것 같다. 기왕이면 처음 시작한 곳에서 마무리하는 게 아름답지 않겠나. 그런 생각도 든다. 마침 현지 언론에서도 희미한 가능성을 전한다.
뭐, 켈리 부부가 한 번 더 수고해 주면 좋겠다. 괜찮은 시계 선물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차베스 러빈(Chavez Ravineㆍ다저 스타디움의 별칭)의 마운드에 선 그의 모습이 다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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