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넥센(현 키움)에서 사령탑으로 첫발을 뗐던 염경엽(55) LG 감독은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스프링캠프 시작 전부터 주전과 백업, 선발과 구원 보직을 일찌감치 확정했다. 대개 캠프에선 무한 경쟁 체제를 구축하기 마련인데 염 감독은 달랐다. 시즌 준비에 맞춰 선수 각자에게 명확한 역할과 책임을 부여했다.
당시 염경엽 감독이 새로운 주전 포수로 내세운 선수가 박동원(33)이었다. 1군에선 2010년 7경기 뛴 것이 전부로 상무에서 갓 전역한 신예였다. 가능성 있는 유망주로 기대를 모았지만 바로 주전으로 발탁한 것은 파격이었다. 염 감독은 “포수로서 가능성과 비전을 봤다. 방망이도 좋다. 성실하고 적극적인 멘탈을 지녔다”고 박동원에게 기대했다.
염 감독의 눈은 정확했다. 2013년 성장통을 겪은 박동원이지만 2014년 시즌 중반부터 잠재력티 터지며 주전 포수로 자리잡았다. 염 감독은 2016년을 끝으로 넥센을 떠났지만 박동원은 계속 경험을 쌓으며 성장을 거듭했다. 지난해 4월 KIA로 트레이드된 뒤 풀타임 주전 포수로서 경쟁력을 끌어올렸고, LG와 4년 65억원에 계약하며 FA 대박도 쳤다.
박동원이 오기 전 LG는 염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선임했다. 2013년 넥센에서 처음 감독과 선수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이 10년이 흘러 LG에서 나란히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염 감독과 박동원 모두 한국시리즈 우승 경험 없었고, 공통된 목표를 갖고 LG에서 다시 의기투합했다.
지난 2월 애리조나 스프링캠프 때 박동원은 “10년 전은 내가 여러모로 부족했고, 감독님한테 혼도 많이 났다. 그때는 너무 어렸고, 잘 모르는 게 많다 보니 욕먹을 짓도 했다”고 돌아보며 “감독님과 7년 만에 다시 같이 하는데 아쉽다. 감독님이 연습 때 중요한 포인트들을 말씀해주셨다.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했지만 감독님이 해주신 말씀을 조금 더 빨리 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생각이 같아야 시너지 효과가 나온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박동원은 올 시즌 130경기 타율 2할4푼9리(409타수 102안타) 20홈런 75타점 OPS .777로 활약하며 LG의 정규시즌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시즌 후반 타격 페이스가 떨어지긴 했지만 6월 중순까지 홈런 1위를 달릴 정도로 장타력을 뽐냈다. 수비에서도 LG의 팀 평균자책점 1위(3.67)를 이끌며 안방을 지켰다. 염 감독은 “블로킹은 우리나라 포수 중 최고”라며 박동원의 수비력을 치켜세웠다.
한국시리즈에서도 박동원이 결정적인 순간 빛났다. 지난 8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2차전. LG가 3-4로 뒤진 8회 1사 2루에서 이번 포스트시즌 5경기 6이닝 무실점 중이던 KT 철벽 불펜 박영현의 초구를 공략했다. 한가운데 몰린 124km 체인지업을 놓치지 않고 잡아당겨 좌중간 담장 밖으로 넘겼다.
맞는 순간 홈런을 직감한 타구. 시속 166km로 122.3m를 날아가 다. 5-4 LG의 역전승을 이끈 결승 홈런으로 잠실구장을 일순간에 뒤집어 놓았다. 1루로 향하며 배트를 높이 들고 내던진 박동원은 홈에 들어온 뒤 덕아웃에서 양팔 번쩍 들고 환영하는 염 감독을 얼싸안으며 기뻐했다.
1차전을 패한 데 이어 2차전도 어려운 경기가 되면서 염 감독에겐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역대 한국시리즈 1~2차전을 내준 팀의 우승 확률은 10%(2/20)에 불과했다. 하지만 ‘애제자’ 박동원의 한 방이 염 감독과 LG를 구해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염 감독은 “가장 중요한 순간 (박)동원이가 역전 홈런을 쳤다. 단순한 1승이 아니다. 우리 선수들이 시리즈에서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경기가 됐다”며 “팬분들이 외치는 것처럼 덕아웃에서도 선수들이 ‘박동원, 박동원’ 하고 똑같이 외쳐줬다. 지금 우리 선수들은 어느 때보다 우승에 대한 열망과 절실함이 있다. 그런 절실함이 있어 승리할 수 있었다”고 고마워했다.
박동원은 홈런 상황에 대해 “타석에 들어가면서 3루수를 쳐다봤다. 어떻게든 팀에 도움이 되기 위해 기습 번트를 댈까 고민했는데 치길 잘했다”며 웃은 뒤 “상대 투수(박영현) 구위가 좋아서 늦지만 말자는 생각으로 쳤는데 스윙이 잘 나왔다. 홈런 후 기분이 너무 짜릿했다. (덕아웃에서 선수들에게) 많이 맞았고, 좋아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소리도 많이 지르고 하다 보니 눈물이 살짝 고인 것 같다”며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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