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백종인 객원기자] 지난달 19일이다. 와일드카드(WC) 결정전이 열렸다. 두산과 NC의 일전이다. 중반까지 팽팽하다. 5회 초 스코어는 5-3이다. 앞서가던 다이노스가 무사 1, 2루의 위기를 맞았다. 선발 태너 털리를 내리고, 이재학을 투입한다. 중요한 승부처라고 본 것이다.
잠깐의 쉼표가 생긴다. 연습 투구 시간이다. 그라운드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하다. 다음 타순이 양의지, 양석환 차례다. 타구 하나에 전체 승부가 갈릴지 모를 순간이다.
엄중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2루 쪽에서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가볍게 몸을 풀던 유격수가 해맑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주자를 향해 말을 건넨다. 뭔가는 묻는 모습이다. 손을 아래로 내려서 던지는 동작이다. 마치 ‘이렇게 하려면 뭘 신경 써야 하나요?’ 하는 것 같다.
보기에 따라서는 갸웃거릴 수 있는 장면이다. 포스트 시즌 아닌가. 단판 승부나 다름없는 게임이다. 게다가 중요한 승부처였다. ‘지금, 이 타이밍에? 한가롭게 그런 걸?’ 그렇게 여길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배움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법. 흔쾌히 요청이 수락된다. 강사(2루 주자)는 전혀 거리낌이 없다. 마치 애제자를 대하는 눈빛이다. ‘이렇게, 저렇게. 너무 강하면 안 되고, 적당히 부드럽게….’ 그런 식으로 설명을 이어간다. 친히 시범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철없는(?) 수강생은 21세의 유격수 김주원이다. 일타 강사는 골든글러브 2회(2015, 2016) 수상자 김재호(38)다. 전성기 수비만 놓고 보면 리그 최고 레벨로 꼽힐 만하다. 특히 부드러움으로 커버하는 넓은 폭은 명성이 자자하다. 그야말로 ‘티 나지 않게 잘하는’ 스타일이다.
그러고 보니 수강생의 유신고 시절 인터뷰가 떠오른다. 가장 닮고 싶은 선수로 일타 강사를 꼽은 바 있다. “김재호 선배님의 안정적인 수비와 정확도 높은 송구를 닮고 싶다”는 얘기였다.
어제(31일) 플레이오프 2차전이다. 홈 팀 KT가 9회 말 최고의 기회를 잡았다. 3-2 열세를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2사) 만루 찬스다.
카운트는 2-1로 타자 편이다. 운명의 4구째. 129km짜리 포크볼이 안쪽 높은 코스를 노린다. 오윤석의 배트가 힘차게 출발했다. 약간 먹힌 타구는 3ㆍ유간으로 방향을 잡는다. 웬만하면 내야 안타로 동점, 빠지면 역전 끝내기도 가능한 궤적이다.
그 순간. 어디선가 슈퍼맨이 나타난다. 먼 거리를 달려오더니, 번쩍 날아오른다. 그리고 떨어지는 공을 지면 바로 위에서 낚아챈다. 극적인 27번째 아웃이다. 관중석은 거대한 환호와 탄식으로 뒤덮였다. ‘The Catch’라고 부를만한 슈퍼 플레이다.
3루수 서호철, 2루수 박민우가 달려온다. 슈퍼맨을 끌어안고, 격렬하게 양쪽 뺨을 어루만진다. 신통하고, 기특한 마음의 표시다. 마운드의 이용찬은 오죽하겠나. 한껏 팔을 벌려 안도의 포옹으로 고마움을 표현한다.
반면 홈팀 덕아웃은 망연자실 그 자체다. 한동안 얼어붙었다가 비디오 판독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봤다. 물론 소용없는 일이다.
각종 커뮤니티에는 이 수비에 대한 감탄과 칭찬으로 도배된다. 리플레이 화면을 보면 수비 폭이 실감된다. 2루 주자 뒤에서 위치를 잡았던 김주원이 타구와 함께 10m 정도를 달려오며 다이빙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특히 한 네티즌은 ‘권희동 아내의 SNS’라며 캡처 화면 하나를 올렸다. 게시물에는 슈퍼 캐치 장면과 함께 이런 멘션이 달렸다. ‘아.. 애 낳을 뻔… 역대급 쫄깃, 없던 태동도 느껴지는 것 같고, 진정이 안 되네.’ (좌익수 권희동은 이날 실점의 빌미가 된 실책을 범했다.)
유신고 출신의 김주원은 2021년 드래프트에서 KT에게도 기회가 있었다. 2차 지명 때 NC의 바로 앞순위(5번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심우준이 확고했고, 대체 자원으로 김상수도 있었다. 따라서 장안고 출신 투수 신범준을 1번으로 지명했다.
덕분에 김주원의 차례는 다이노스까지 넘어갔다. 첫해(2021)부터 69게임을 출전하며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올해는 풀타임으로 자리를 굳혔다. 가장 많은 실책(29개)이 논란이지만, 넓은 수비 범위를 감안해야 한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특히 아시안게임 대표로 뛴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함께 훈련했던 최지훈(SSG)이 “상대 팀으로 게임할 때는 몰랐는데, 함께 연습해 보니까 다르더라. (김)주원이 공 던지는 것 보고 정말 놀랐다. 나도 던지는 건 자신 있는데, 주원이는 어깨가 생뼈”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슈퍼라운드 때는 일약 주전으로 기용됐다. 당초 박성한을 먼저 생각했던 류중일 감독이었다. 그러나 태국전 홈런을 인상 깊게 보고 김주원에게 기회를 줬다. 이후 쏠쏠한 활약으로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팀에 복귀해서도 완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가파른 성장세를 지켜본 MBC Sports+ 박재홍 해설위원은 이렇게 말한다. “예전 중ㆍ고등학교 때 생각이 난다. 여름 방학 끝나고 모였는데, 한 10cm는 훌쩍 커서 온 친구가 있다. 김주원의 모습이 그런 것 같다. 볼 때마다 몰라보게 쑥쑥 자란다.” 아마 그의 성장세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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