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백종인 객원기자] 2-1이던 7회 초다. 원정팀 D백스가 득점 기회를 잡았다. 선두 알렉 토마스가 2루타로 문을 열었다. 그다음 에반 롱고리아가 강렬한 타구를 뿜어낸다. 3루수를 뚫고, 좌익수까지 가는 적시타다. 힘겨운 추가점이 올라갔다. (한국시간 29일 텍사스-애리조나, 월드시리즈 2차전)
스코어 3-1에서 계속된 무사 1루다. 9번 제랄도 페도모가 타석에 나온다. 하지만 스윙할 의사가 전혀 없다. 처음부터 번트 동작이다. 초구를 댔지만 파울, 다음 공도 또 시도한다. 이번에는 정확하게 투수 앞으로 굴린다. 1사 2루를 만드는 전형적인 희생타다.
D백스의 작전은 2사 후에 완성된다. 코빈 캐럴의 좌전 안타로 롱고리아가 홈을 밟았다. 4-1로 점수 차이를 더 벌린다.
8회에는 한술 더 뜬다. 5번 토미 팸이 안타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깨알 같은 작전이 다시 펼쳐진다. 타석의 루어데스 구리엘 주니어는 볼 것도 없다. 초구부터 배트를 내린다. 3루 쪽에 절묘한 번트다. 팸을 안전하게 2루까지 보내고, 자신은 장렬히 산화한다.
2사 후. 볼넷-볼넷에 이어 적시타 2개(마르테, 캐롤)가 연달아 터진다. 4-1은 7-1이 됐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승부다. 전날 같은 역전패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월드시리즈가 1승 1패로 균형을 맞췄다.
두 팀의 색깔은 뚜렷이 구별된다. 레인저스는 멀리치기가 전략 자산이다. 내내 끌려가던 1차전도 이걸로 해결했다. 9회 동점 투런(코리 시거), 11회 끝내기 대포(아돌리스 가르시아)로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정규시즌 233개로 30개 구단 중 공동 3위를 기록한 거포 군단의 위용이다.
반면 D백스는 다르다. 홈런 숫자로는 비교가 안 된다. 166개(22위)로 많이 밀린다. 대신 다른 무기가 있다. 꼼꼼함이다.
우선 눈에 띄는 건 달리기다. 페넌트레이스에서 도루 190개(전체 2위)를 성공시켰다. 실패는 26번뿐이다. 무려 86.5%의 성공률이다. 코빈 캐롤(54개)을 비롯해 제이크 맥카시(26개), 페도모(16개) 등 10개 이상을 훔친 주자가 5명이나 된다.
PS에서도 쉬지 않는다. 방울뱀들은 틈만 나면 달린다. 벌써 21개를 성공시켰다(실패 3개). 10개를 기록한 레인저스의 2배가 넘는다.
무엇보다 시선을 끄는 부분이 있다. 스타일이다. 고리타분하고, 낯선 스몰 볼을 펼친다. 대표적인 게 희생 번트(Sacrifice Bunt)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구사한다. 정규시즌에서도 36개를 기록했다. 30개 팀 중 단연 1위다(2위 오클랜드 28개).
가을(PS)에도 멈추지 않는다. 벌써 8번이나 기록했다. 레인저스 같은 팀은 이 숫자가 아예 ‘제로’다. 대부분 팀이 그렇다. 기껏해야 1개 정도 할까 말까다. 그런데 그들은 아니다. 기회만 생기면 아웃 1개를 거래한다. 2루에 보내는 걸 망설이지 않는다. (정규시즌 162게임 동안 희생번트 숫자가 8개 이하인 팀이 7개나 된다.)
희생타 8개 중 3개가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 나왔다. 7회와 8회 리드를 잡고도 보내기 작전이다. 심지어 4-1로 앞서는 상황에도 초구부터 굴린다. 마치 KBO(한국)나 NPB(일본) 리그를 보는 것 같다. PS 1경기에 희생 번트 3개는 2011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이후 처음 나온 기록이다. 월드시리즈에서는 1960년 이후 5번째다.
김성근 전 감독이 늘 하던 말이다. 가장 적극적인 공격이 번트라는 지론이다. 상대를 압박해, 1점이 아니라 2~3점도 얻을 수 있는 작전이라고 설파했다. 그 말이 입증된 것이 WS 2차전이다. 착실한 희생타 덕분에 2-1이 4-1, 7-1로 벌어지고, 결국 상대가 무너지고 말았다. 최종 스코어는 9-1이다.
D백스는 언더독이다. 늘 다저스, 자이언츠와 같은 빅 클럽과 경쟁해야 한다. 최근에는 파드리스도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런 디비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포스트시즌에서는 더 괴물 같은 팀을 만나게 된다.
2017년 부임한 토레이 로불로 감독은 차별화를 통해 경쟁력을 얻었다. 첫 해 93승 69패로 NLDS까지 진출했다. 다저스에 패했지만, 그 해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후 6년 만에 다시 가을 야구에 나서, 22년 만에 패권을 노리고 있다.
애리조나의 GM(단장) 마이크 헤이즌은 “우리가 다른 팀처럼 홈런을 많이 치는 라인업을 갖추기는 쉽지 않다. 대신 다른 방법으로 이겨야 한다. 단타 1개를 중요하게 만들고, 그걸 점수로 바꾸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고 번트 작전을 지지했다.
그런 GM조차 예상하지 못한 순간이 있었다. 이날 3회에 나온 에반 롱고리아의 번트였다. 3번이나 올스타에 뽑힌 타자다. 실버 슬러거에도 선정된 바 있다. 아기자기함과는 영 거리가 멀다. 마지막 번트는 자신도 기억하지 못한다. 2014년에 유일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는 “감독의 사인은 아니다. 미리 준비한 것도 아니었다. 경기 전에는 상상도 하지 않던 일이다. 그런데 그 순간 타석에서 그렇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게 우리가 게임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낡고, 초라하다. 오래된 서랍 속의 싸구려 볼펜 같은 존재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그랬다. 스몰 볼(small ball). 그 하찮고, 구태의연한 방식이 이번 가을에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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