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 요건을 갖추고 내려온 메릴 켈리(35)에게 토레이 로불로(58)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감독이 악수를 청했다. 투수 교체를 의미하는 악수에 켈리가 발끈했다. 로불로 감독과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등을 돌렸다. 감독에게 반기를 들 만큼 자신감이 넘쳤다.
KBO리그 출신 투수 켈리는 지난 24일(이하 한국시간) 2023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NLCS) 6차전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 강타선을 5이닝 3피안타 3볼넷 8탈삼진 1실점으로 봉쇄했다. 최고 93.9마일(151.1km), 평균 92.3마일(148.5km) 포심 패스트볼(25개) 외에도 싱커(21개), 체인지업(14개), 슬라이더, 커터(이상 11개), 커브(8개) 등 6가지 구종을 원하는 곳으로 구사했다. 결정구로 주로 쓰는 체인지업뿐만 아니라 포심, 싱커, 커브도 다양하게 활용했다.
5회 마지막 타자 브라이스 하퍼를 낙차 큰 커브로 헛스윙 삼진 처리한 켈리는 선발승 요건을 갖췄다. 4-1, 3점차 리드 상황에서 로불로 감독은 투수 교체를 결정했다. 투구수가 90개였기 때문에 적절한 교체 타이밍이었지만 켈리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1~2회에만 볼넷 3개를 내주며 커맨드가 흔들렸지만 3회부터 안정을 찾았고, 4~5회 연속 삼자범퇴 포함 8타자 연속 아웃으로 기세를 바짝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을야구 들어 한두 박자 빠른 투수 교체를 하는 로불로 감독은 교체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6회 시작부터 나온 라이언 톰슨(1⅓이닝)에 이어 앤드류 살프랭크(⅔이닝), 케빈 진켈(1이닝), 폴 시월드(1이닝)으로 이어진 불펜이 4이닝 무실점을 합작하며 애리조나의 5-1 승리를 완성했다. 켈리는 승리투수가 됐고, 벼랑 끝에서 3승3패를 만든 애리조나는 NLCS를 최종 7차전까지 끌고 갔다.
‘MLB.com’에 따르면 경기 후 애리조나 외야수 토미 팸은 “켈리는 더 가고 싶어 했다. 그는 덕아웃에서 로불로 감독과 싸우고 있었는데 난 ‘그냥 놔두자’라는 생각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상대팀인 필라델피아 외야수 닉 카스테야노스도 “거의 실투가 없었다. 켈리의 공 움직임이 아주 좋았다”고 거들었다.
켈리는 글러브와 모자, 점퍼를 챙겨 덕아웃을 빠져나갔는데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리는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경기 후 공식 인터뷰에서 켈리는 “경기 중 교체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고집이 세서 그런 것도 있지만 상황이 그랬다. 그 순간 내가 화났던 이유는 너무 방심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어 켈리는 “상위 타선의 타자 3명을 상대하면서 삼진 2개를 잡았다. 5회까지 투구수 90개였고, 6회 확실히 다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덕아웃에서 악수를 청하는 로불로 감독의 손을 봤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리그챔피언십시리즈 6차전 상황이긴 했지만 난 팀 승리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내 마음가짐이었다”고 덧붙였다.
잠시 클럽하우스에서 마음을 추스른 뒤 로불로 감독과 대화하며 화를 풀었다. 켈리는 “그 이닝이 끝난 뒤 감독과 대화를 나눴다. 감독이 나를 내린 이유와 그 배경을 설명해줬다. 난 우리 불펜을 믿는다. 내 뒤에 나오는 선수들을 못 믿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컸다”며 “뒤에 나온 선수들이 잘했고, 우리가 이겼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로불로 감독은 “내가 켈리에게 원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는 믿을 수 없는 경쟁심을 가진 선수로 자신의 힘이 다할 때까지 경기에서 빠지는 걸 결코 원치 않는다. 그는 내게 계속 던질 수 있다고 말했지만 난 어려운 결정을 해야 했다. 효율적인 불펜에 공을 넘겨야 했다”며 “켈리는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3회까지 65구를 던진 것이 걱정스러웠다. 그의 투구량을 관리하며 투구 내용을 지켜보고 있었고, 교체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