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위험에 빠진 가족들을 두고 마운드에 올랐다. 불안과 슬픔을 억누르고 공을 던졌다. 6실점으로 무너졌지만 동료들은 그를 자랑스러워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 우완 투수 딘 크레머(27)의 프로 정신은 승패를 떠나 큰 귀감이 됐다.
크레머는 지난 11일(이하 한국시간) 2023 아메리칸리그 디비전시리즈(ALDS.5전3선승제) 3차전에서 텍사스 레인저스 상대로 1⅔이닝 7피안타(2피홈런) 1볼넷 6실점으로 무너지며 패전을 안았다. 1회 코리 시거에게 선제 솔로포를 맞더니 2회 아돌리스 가르시아에게 스리런 홈런을 허용하며 조기 강판됐다.
볼티모어도 1-7로 패하면서 텍사스에 시리즈 전적 3전 전패로 무릎 꿇었다. 정규시즌 성적은 볼티모어(101승61패)가 텍사스(90승72패)를 압도했지만 포스트시즌에서 예상 못한 이변이 일어났다. 볼티모어로선 큰 충격.
하지만 ‘MLB.com’에 따르면 볼티모어 선수들은 크레머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경기 전부터 1루수 라이언 오헌을 비롯해 동료들은 “크레머가 우리들을 위해 뛰는 것처럼 우리도 크레머를 위해 뛰고 싶다”고 뭉쳤다.
경기 후 투수 카일 깁슨은 “그 누구도 오늘 크레머와 같은 상황을 겪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안타깝다. 아마 많은 생각이 들 텐데 지난 5일간 이런 상황을 이겨낸 모습은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가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크레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탁턴에서 태어났지만 부모 모두 이스라엘 출신으로 이중 국적을 갖고 있다. 2016년 이스라엘 시민권자로는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드래프트돼 계약을 한 그는 올해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도 이스라엘 대표로 출전했다. 가족 중 상당수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있고, 크레머도 비시즌마다 이스라엘을 찾는다.
그런데 지난 주말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습하면서 가족들도 전쟁 위험에 빠졌다. 이스라엘이 하마스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가자지구 공습을 이어가면서 무력 충돌로 인한 사망자가 닷새 만에 2000명을 넘어섰다. 확전 우려 속에 이스라엘 정부가 예비군 36만명에 대한 총동원령을 내리는 등 그야말로 비상사태.
안전이 위험해진 가족들을 생각하면 크레머도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가족들은 신변에 문제가 없었지만 온전히 야구에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 하지만 크레머는 예정된 등판을 거르지 않았다. 그는 지난 10일 등판 전날 공식 인터뷰에서 “우리 가족은 괜찮지만 매우 슬픈 상황이다”며 “클럽하우스 거의 모든 사람들이 48시간 내내 한 번씩 안부를 물어줬다. 그것에 매우 감사하다. 머릿속에 (이스라엘 상황이) 남아있겠지만 등판하는 것에 망설임은 없다”고 말했다.
비록 이날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크레머는 올해 볼티모어의 AL 동부지구 우승 주역으로 활약했다. 32경기(172⅔이닝) 13승5패 평균자책점 4.12 탈삼진 157개로 선발진 한 축을 이뤘다. 크레머는 이날 경기 후 “기분이 안 좋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포스트시즌을 처음 맛보는 것이다. 앞으로 좋은 시기가 많이 남았다. 우리는 100승 이상 거둔 3개팀 중 하나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면 월드시리즈 우승 목표에 도달할 것이다”고 밝은 미래를 기대했다.
한편 볼티모어는 2020년 코로나19 단축 시즌을 제외하고 정규시즌 때 한 번도 스윕을 당하지 않은 16개팀 중 포스트시즌에서 스윕으로 탈락한 역대 두 번째 팀이 됐다. 1998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뉴욕 양키스에 월드시리즈 4연패로 끝난 바 있다. 브랜든 하이드 볼티모어 감독은 “모두 예상을 뛰어넘고 지구 우승을 차지한 우리 선수들이 자랑스럽다. 마지막 3경기가 아쉽지만 6개월 동안 최선을 다했고, 성공적인 시즌이었다. 선수들이 자랑스럽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성적을 낼 것이다”고 자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