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기억
[OSEN=백종인 객원기자] 다음은 존 페로토라는 기자의 회고다. 피츠버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인물이다.
1994년 8월의 일이다. 파업으로 월드시리즈마저 취소된 시즌이다. 얘깃거리를 찾으러 버펄로로 향했다. 파이어리츠의 마이너리그팀(AAA)이 있는 곳이다. 한 투수와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27세의 팀 웨이크필드였다.
2년 전만 해도 완전 무명이었다. 드래프트 8번으로 입단한 1루수다. 하지만 자질이 없었다. 타율이 2할도 못 넘겼다. 정리 대상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던 중 코치 한 명이 별 생각 없이 한 마디를 던졌다. “투수 한번 해볼래? 아까 캐치볼 할 때 던진 공이 괜찮던데.”
고민할 필요도 없다. 아니면 짐을 싸야 한다. 곧바로 마운드로 달려갔다.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춤추는 너클볼이 세상과 만나게 된다. 시즌 중반에 콜업돼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8승 1패(ERA 2.15)를 기록했다. 마법의 공에 여러 별명이 붙었다. 핑거 네일볼(fingernail-ball), 드라이 스핏볼(dry-spitter) 쿠바산 나비(Cuban butterfly). 그거 하나면 두려울 게 없었다.
하지만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듬해부터 처참하게 무너졌다. 6승 11패, 평균자책점은 5.61로 치솟았다. 똑같이 던지는데, 도무지 통하지 않는다. 배팅볼이나 다름없다. 다시 마이너리그 생활로 돌아갔다.
페로토 기자의 인터뷰가 그 무렵이다. “클럽 하우스에서 만났죠. 그는 아주 친절하고, 공손했어요. 의자 하나를 가져와서 앉으라고 권하더군요. 그러고는 긴 대화가 시작됐죠.” 고통스러운 얘기가 계속됐다. 왜 갑자기 급격한 슬럼프가 찾아왔는지. 이유가 무엇인지. 좌절과 혼란만 가득했다.
“(인터뷰가) 15~20분쯤 지났을 거예요. 갑자기 그 친구(웨이크필드)가 눈물을 흘리더군요. ‘안 해 본 것이 없어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라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더군요. 나도 옆에서 마음이 아팠어요. 그렇게 반듯한 친구가 고통받는 게 너무 안타까웠죠.”
두 번째 기억
결국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얼마 뒤 파이어리츠는 그를 포기했다. 방출 통보를 받았다. 짧은 반짝임은 그걸로 끝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구원의 손길이 나타났다. 엿새가 지난 어느 날이다. 휴대폰이 울렸다. 보스턴 지역번호가 찍힌 전화였다.
“이봐, 아직은 (나이가) 좀 이르지 않아? 우리와 함께하면 어떨까?” 레드삭스의 댄 듀켓 단장이었다. 물론 좋은 조건일 리 없다. 마이너리그 계약이었다. 게다가 조건이 하나 붙었다. “플로리다에 가서 좀 있다가 오게.”
부랴부랴 짐을 꾸렸다. 비행기에 몸을 싣고 (플로리다) 포트 마이어스라는 작은 도시로 떠났다. 찾아간 곳은 어느 여자 야구팀이다. 그들을 가르치는 은발의 신사를 만나게 됐다. 전설적인 투수 필 니크로다. 그리고 한 명이 더 있었다. 동생 조 니크로도 함께다. 합해서 539승을 올린 형제 너클볼러다.
운명적인 만남이다. 버려진 27살짜리 투수에게는 마치 메시아 같은 존재다. “필(니크로)은 늘 웃는 얼굴이었어요. 한 번도 나를 다그치거나, 몰아붙인 적이 없었죠. 마치 내가 겪은 일을 자신도 모두 겪었다는 눈빛이었죠. 아버지나 형제, 때로는 전쟁터를 함께 한 전우 같은 느낌이었어요.” 웨이크필드의 회고다.
꽤 유용한 기술 전수가 이뤄졌다. ▶ 매번 결정구라는 마음으로 던져라. ▶ 빠른 볼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라. ▶ 파울을 유심히 관찰해라. ▶ 그러면 40살이 넘어서도 계속 공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미니 캠프가 끝날 무렵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전한다. “이봐, 자꾸 뭘 하려고 하지마. 정확한 동작과 리듬으로 던지면 그만이야. 나머지는 그냥 공에게 맡겨야 해. 자네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은 없어. 너클볼이란 그런 공이야.”
그 해에 16승(8패) 투수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빨간 양말을 신고 17시즌을 보냈다. 보스턴 유니폼을 입고 186승을 올렸다. 저주를 풀고, 2개의 월드시리즈 반지를 얻었다. 통산 200승 투수가 됐다. 은사의 말은 예언이 됐다. 44세까지 마운드에 살아남았다.
세 번째 기억
2008년 5월이다. 메모리얼 데이(현충일) 시리즈였다. 시애틀에서 등판이 잡힌 날이다. 클럽하우스에 메모 하나가 전달됐다. 홈 팀 선수가 보낸 쪽지다. “게임 전에 몸 풀 때 가서 구경 좀 할 수 있을까요?”
이건 뭐지? 황당한 부탁이다. 상대편 선발 투수의 워밍업을 보겠다니. 불펜까지 직접 와서 말이다. 아무리 격식은 안 차린다고 해도 그렇다. 경우가 없어도, 너무 없다. 실례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놓고 염탐하겠다는 말 아닌가.
그런데 놀랍다. 수신자의 반응이 너무나 쿨하다. “와이 낫(Why not)?” 얼마든지 와서 보라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동료들 눈치가 보일 텐데…. 하지만 그런 걱정도 없다. 하긴. 42세 왕고참 투수다. 감히 누가 그에게 뭐라고 하겠나.
결국 만남이 이뤄졌다. 수강생은 눈에 불을 켠다. 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질 않는다. 질문이 쏟아진다. ‘실밥 어디를 어떻게 찍느냐.’ ‘릴리스 느낌은.’ ‘팔 각도는.’ 10분만 보겠다던 견습생은 무려 45분을 머물다 갔다.
그리고 4년 뒤. 이 수강생은 사이영상 수상자가 됐다. 33살 때의 R.A. 디키다. 수상 소감 때 은사에 대한 얘기를 빼놓지 않는다. “아마 아무도 그렇게 해줄 수 없을 거예요. 그때 팀(웨이크필드)의 가르침이 큰 도움이 됐어요.”
감사 인사에 대한 반응이다. “그 친구가 무척 어려운 시절이었죠. 계속된 실패 탓에 여기저기를 떠돌았죠. 절망하던 내 예전 모습이 떠올랐어요. 사실 우리(너클볼러)끼리는 당연한 일이죠. 나도 녹음기 하나 들고 안 찾아가 본 데가 없으니까요.”
“남자답지 못한 공” 대놓고 비판하는 타자들
니크로 형제, 찰리 허프, 톰 캔디오티, R.A. 디키…. 너클볼 투수들끼리는 유독 남다르다. 끈끈한 유대감이 존재한다. 나비 형제(Butterfly Brotherhood)라고도 불리는 그들의 공통점이 있다. 절망의 끝에서 만난 공을 던진다는 점이다.
웨이크필드도 마찬가지다. 그게 안 되면 끝이었다. 마지막으로 매달린 것이 플로터(Floater, 너클볼)였다. 그러나 성공한 뒤에도 주변의 시선은 싸늘했다. 늘 이단으로 취급됐다. 윌리 메이스 같은 타자는 대놓고 비판했다. 남자답지 못한, 트릭을 쓰는, 괴물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상당수 여론도 비슷했다. 커리어 내내 안정적인 신뢰를 얻었던 적은 없다. 언제 또 어떻게 무너질지 모른다는 점 때문이다. 그건 너클볼이 가진 한계이기도 하다. 잘 되는 날은 마구가 됐다가, 아니면 배팅볼로 변하는 불확실성 탓이다.
10승을 넘긴 게 11시즌이나 된다. 16~17승도 네 번을 거뒀다. 하지만 이렇다 할 수상 기록은 없다. 올스타(2009년) 한 번이 고작이다. 200승을 채웠지만, 명예의 전당과도 거리가 멀다. 2017년 투표 때 0.2%의 득표율에 그쳤다.
그러나 가장 영예로운 상을 받은 적이 있다. 스포츠맨십과 인품, 사회 공헌도로 시상하는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이다. 8번이나 후보에 오를 정도로 단골이었다. 결국 2010년에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스스로 “평생의 자랑거리”라며 기뻐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플로리다 멜번이다. 이곳 아이들 중 유독 티모시(Timothy, 애칭 Tim)라는 이름이 많다. 늘 품격 있고, 친절하며, 존경받는 웨이크필드를 본받으라는 뜻이다.
레드삭스 구단은 지난 2일 성명을 발표했다. “기록을 넘어서 따뜻한 마음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 선수였다. 웨이크필드의 별세(향년 57세)는 우리에게 깊은 슬픔을 안겨줬다.” (존 헨리 구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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