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께 받은 게 워낙 많아서…”
한화 정우람(38)이 KBO리그 투수 최초로 1000경기 출장 대기록을 세운 지난 2일 대전 NC전. 경기를 마친 뒤 정우람이 각종 인터뷰를 하느라 1시간 이상 훌쩍 흘렀다. 그때까지 퇴근하지 않고 정우람 곁을 지킨 후배가 있었으니 바로 마무리투수 박상원(29)이었다.
“1000경기를 사람이 할 수 있는 기록인가 싶다. 대단하고 놀랍다. 존경한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고 정우람의 대기록에 큰 존경을 표한 박상원은 한 손에 그를 위한 선물을 몰래 챙겼다. 1000경기 기념으로 H사 명품 신발을 준비한 것이다. 자신도 신어보지 못한 명품을 정우람을 위해 구입했다.
박상원은 “그동안 선배님께 받은 게 너무 많다. 밥도 많이 사주시고…제가 뭐 하나 해드린 게 없다. 이런 의미 있는 날에 꼭 선물을 하고 싶었다”며 “무슨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의미 있을까 고민했다. 1000경기나 마운드에 뛰어오르셨으니 신발이 의미 있지 않을까 싶어 로퍼로 결정했다. 마음에 들어하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손에는 야구공이 쥐어져 있었다. “그동안 선배님께 사인을 받은 적이 없다. 오늘 사인받은 공은 평생 소장할 것이다”고 말했다. 정우람의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박상원은 선물과 함께 “사인 하나만 해주십시오”라며 공도 같이 전달했다. “얘 왜 이래?”라며 깜짝 선물에 놀란 정우람도 기분 좋게 정성껏 사인해줬다. 박상원은 “다른 공은 몰라도 이건 꼭 가져야 한다”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박상원에게 정우람은 우상이자 인생의 길라잡이 같은 존재. 공을 던지는 손이 다르고, 투구 유형도 다르지만 2017년 7월 박상원이 처음 1군에 올라온 날 캐치볼 파트너가 되면서 깊은 인연이 시작됐다. 이전까지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이였지만 9년 선배 정우람이 1군에 갓 올라온 박상원을 살뜰히 챙겼다.
박상원은 “그때 우람 선배님 아니었으면 야구를 그만뒀을 것이다. 어머니도 인정하시는 부분이다. 어릴 때 저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애였는데 선배님이 사람으로 만들어주셨다. 거친 돌을 다듬어주신 게 바로 선배님이다. 야구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많이 알려주셨고, 그때부터 선배님 흉내를 내면서 던졌다. 대학 4학년 때 팔이 아파서 많이 못 던졌고, 프로에 와서도 처음에 아팠다. 선배님을 만나 따라한 뒤로 아픈 팔도 싹 다 나았다”며 정우람에게 거듭 감사해했다.
휘문고-연세대를 졸업하고 지난 2017년 2차 3라운드 전체 25순위로 한화에 지명된 박상원은 대학 4학년 때 부상 탓에 6⅓이닝밖에 던지지 못했다. 하지만 최고 152km 강속구를 던진 잠재력을 인정받아 2차 3라운드로 한화에 뽑혔고, 2018년부터 1군 주축 불펜으로 성장했다. 정우람처럼 투구시 양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글러브 안에서 공을 한 번 치고 던지는 동작까지 따라하면서 필승조로 올라섰다.
정우람의 뒤를 잇는 한화 마무리 후계자로 꼽힌 박상원은 군복무를 마치고 지난해 8월 1군에 복귀했다. 올해 스프링캠프 때 팔에 멍이 드는 증세로 1군 출발이 늦었지만 5월부터 마무리 자리를 꿰찼다. 50경기(58⅓이닝) 5승3패16세이브 평균자책점 3.09 탈삼진 53개로 활약하며 한화 뒷문을 든든하게 책임지고 있다. 올해 한화의 수확 중 하나가 박상원이라는 마무리 발굴이다.
박상원의 직구 구속은 평균 147.2km로 입대 전보다 1~2km 빨라졌다. 원래도 빠른 공을 던지는 파워피처였지만 이제는 150km대 강속구를 손쉽게 펑펑 꽂으며 힘으로 타자를 압도한다. 입대 전보다 구속이 빨라진 것에 대해 박상원은 사회복무요원 시절 인천에서 근무 후 SK 투수 출신 엄정욱 감독과 윤희상 코치의 야구 아카데미에서 몸을 만든 효과를 떠올렸다. 군복무 중에도 박상원을 잊지 않고 두 사람을 소개시켜줘 훈련할 수 있게 한 것도 정우람이다.
박상원은 “우람 선배님이 좋은 분들을 소개시켜주셔서 군복무 중에도 야구를 배우고 생각의 틀을 바꿀 수 있었다. 나이를 먹어도 스피드가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구속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며 “처음 마무리를 할 때는 속으로 불안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몰라 갈피를 못 잡고 있었는데 우람 선배님 말씀 덕분에 복잡했던 머릿속이 단순해졌다. 선배님이 말씀하신 대로 기록이나 다른 것 욕심내지 않고 배운다는 느낌으로 계속 부딪쳤다. 남은 시즌도 끝까지 부딪쳐보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