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의 세월이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여 1000경기라는 금자탑이 세워졌다. 한화 정우람(38)이 KBO리그 42년 역사상 최초로 투수 1000경기 출장 대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정우람은 지난 2일 대전 NC전에서 한화가 7-0으로 앞선 7회 선발투수 펠릭스 페냐에 이어 두 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한화생명이글스파크 대형 전광판에는 ‘KBO리그 투수 최초 1000경기 출장’ 기록 문구가 띄워졌고, 대전 홈 관중들은 크게 환호하면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불펜에서 후배 투수들의 도열을 받으면서 마운드로 향한 정우람은 관중들의 열화와 같은 함성에 울컥했다. 첫 타자 오영수를 3구 만에 2루 땅볼로 처리한 뒤 마운드를 내려가면서 또 한 번 기립 박수를 받았다. 최원호 한화 감독에게 꽃다발을 받는 등 선수단과 관중들의 열렬한 축하 속에 마운드를 내려갔다.
덕아웃에 앉은 정우람은 만감이 교차한 듯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2004년 SK(현 SSG)에 입단해 올해로 20년차인 정우람은 18시즌 통산 1000경기 위업을 세웠다. 500~900경기 모두 최연소로 했고, 1000경기는 최초로 해냈다. 148년 역사의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16명, 88년 역사의 일본프로야구에서도 1명밖에 해내지 못한 대기록.
그 사이 974이닝을 던지면서 64승47패197세이브145홀드 평균자책점 3.17 탈삼진 936개를 기록했다. 통산 세이브 6위, 홀드 4위, 12시즌 연속 50경기 등판(2008~2021년, 역대 2호), 8시즌 연속 두 자릿수 세이브(2012~2021년, 역대 3호) 등의 위업을 이뤄냈다.
오랜 기간 실력과 자기 관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기록. 불펜투수는 전성기가 짧은 편인데 정우람처럼 꾸준하고 오래 잘 던진 선수는 오승환(삼성) 외에 찾아보기 힘들다. 보이지 않는 노력과 눈물겨운 관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20년간 수술 한 번 안 할 정도로 타고난 몸에 부드러운 투구폼을 자랑했지만 쓰면 쓸수록 몸은 닳았다. 발목 인대가 끊어지고, 허리 디스크 판정을 받은 뒤에도 티내지 않고 묵묵히 버텨서 만든 1000경기 위업이다.
후배들에게도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2017년 입단 때부터 정우람을 우상으로 따르고 있는 마무리투수 박상원은 “1000경기라니 신기하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기록인가 싶다. 대단하고 놀랍다. 존경한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이런 대기록을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다”며 기뻐했다. 신인 내야수 문현빈도 “막 울컥하고, 가슴이 벅찬다. 저도 정우람 선배님처럼 정말 꾸준하게 계속 경기에 나가 롱런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후배들로부터 물 세례를 받으며 몸이 흠뻑 젖은 정우람은 “이렇게 맞은 건 처음이다”며 당황해하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올 시즌을 끝으로 4년 FA 계약이 끝나는 정우람이라 1000경기 대기록과 함께 은퇴 가능성도 제기됐지만 결정된 것은 없다. 정우람은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 가족들과도 상의하고, 구단과도 상의를 해봐야 한다”며 “지금은 선수이니까 선수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제일 크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다음은 정우람과 일문일답.
-KBO리그 최초 의미 있는 기록을 세웠다.
▲ 그동안 야구를 하면서 개인 기록을 위해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1000경기만큼은 어느 정도 마음 속에 항상 내재돼 있었다. 오늘 불펜에서 준비할 때부터 후배 투수들이 많이 응원해줘 울컥했고, 감사했다. 기록을 세웠지만 앞으로 경기가 남아있다. 오늘 같은 마음으로 선수 생활 끝날 때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덕아웃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보였다.
▲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했다. 전광판에 1000경기 기록이 떴고, 관중 분들의 함성 소리에 후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해왔던 것들이 많이 생각나더라. 마운드에 설 때 주마등처럼 순간적으로 지나갔는데 빨리 정신 차렸다. 감동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이 정도로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에 울컥했다. 2018년 가을야구 등 한화에서의 좋은 순간들이 많이 떠올랐다. 오늘 같은 함성을 듣고 경기에 나간 게 최근 몇 년간 없었다.
-한 타자만 상대하고 교체됐는데 계획된 것이었나.
▲ 한 타자 더 갈 줄 알았는데 빼주시더라(웃음). 감독님이 의미 있는 기록인 만큼 좋을 때 바꿔주신 것 같다.
-1000경기를 달성했는데 앞으로 또 다른 목표가 있다면.
▲ 개인적인 것은 없다. 팀이 잘하는 데 있어서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팀에 좋은 투수들이 많이 성장했다. 이전까지는 내가 경기에 나가는 게 당연시됐다면 이제는 경기에 나가기 위해 도전해야 한다. 앞으로 몇 경기 더 나가겠다, 풀시즌을 하겠다, 몇 살까지 하겠다 이런 목표는 없다. 최대한 1경기라도 더 할 수 있을 데까지 해보자는 마음이다.
-1000경기 달성이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지진 않았다.
▲ 고마운 분들이 너무 많다. 올해 주장을 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동안 같이 했었던 모든 동료 선수들, 만났던 감독님들과 코치님들께 정말 감사한 마음이 시즌 내내 들었다. 마음이 나약해졌던 적도 있었지만 감사한 분들을 떠올리면서 버틸 수 있었다.
-1000경기 달성에 있어 가장 큰 고비였던 시기는 언제인가.
▲ (2019년 6월11일 달성한) 800경기 넘어서부터 몸이 조금만 안 좋아도 힘들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동안 티는 내지 않았지만 경기를 준비하는 것부터 다음날 몸 상태 회복이 예전 같지 않았다. 그래도 또 잘 이겨냈다. 1경기 1경기 최선을 다했더니 여기까지 왔다.
-그동안 큰 부상 없이 롱런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뭔가.
▲ 어렸을 때 기초 체력이나 이런 훈련하는 부분에 있어 정립이 잘 됐던 것 같다. 공을 던질 때 하체가 튼튼해야 하는데 초중고를 거쳐 프로 초년까지 기초 운동을 많이 했다. 이때 잘 잡아놓은 것이 부상 방지나 공을 던질 때 쓸데없는 힘이 많이 들어가지 않는 데 도움이 됐다. 그러면서 기술이나 경험이 쌓여 성장할 수 있었다.
-투수가 20년간 수술 한 번 안 하기도 쉽지 않다.
▲ 사실 수술만 안 했지, 팔뿐만 아니라 허리나 발목도 안 좋다. 발목 인대가 끊어진 지 꽤 됐다. 발목은 인대가 3개 정도 지탱하고 있는데 한두 개 떨어져도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하다. 나이 먹으면서 기능이 떨어지면 발목 힘이 약해진다. 지금도 발목에 테이핑을 하면서 하고 있다. 3년 전인가 허리 디스크 판정도 받아서 관리하고 있다. 그래도 막상 유니폼을 입고 땀 흘리면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그림은 나온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열심히 하게 된다. 그런 운동 선수들이 많다.
-언제까지 선수 생활을 하겠다는 계획이나 목표가 있는가.
▲ 시즌이 거의 끝나가고 있으니 그런 부분을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구단과 상의하고, 가족들과도 다시 상의를 해야 한다. 지금은 선수이니까 선수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제일 크다. 내년부터는 내 자리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만약 선수 생활을 이어간다면 도전이다. 어디 뼈가 부러지지 않는 이상 선수로서 1경기라도 더 나가고 싶은 마음이다. 나보다 더 나이 드신 형들도 잘하고 있는데 정말 대단하다. 몸만 안 아프면 10년은 더 하고 싶다(웃음).
-1000경기 외에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기록이 있다면.
▲ 지금 197세이브인데 나중에 생각이 많이 날 것 같다. 홀드도 150개까지 5개 남았는데 (200세이브 150홀드는) 최초라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런 상황에 나갈 상황이 안 된다. 그건 인정해야 한다. 1000이닝도 20이닝 정도 남아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이제는 개인 기록을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 것 같다. 얼마나 더 나갈지 모르겠지만 1경기라도 더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다.
-1000경기 모두 구원등판인데 선발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
▲ 어렸을 때는 많이 했다. 고등학교 때 선발을 하고, 프로 와서도 2군에서 선발로 던졌다. 캠프에 가서 선발을 하기도 했는데 정작 1군에선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신기하다. 예전에 한 번 ‘구원투수로 최고가 되겠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선발로서 내가 과연 최고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스스로 생각해도 물음표가 많이 달렸다. 하지만 구원으로선 내가 대한민국 최고가 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거기를 자꾸 파고들어갔다. 선발 보직을 요청하거나 도전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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