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백종인 객원기자] 역시 1위 팀이다. 한 번의 기회에 3점 차를 뒤집어 버린다. 7회 초. 한꺼번에 4점을 뽑아 6-5로 역전했다. 박해민의 번개 같은 달리기가 혼을 쏙 빼놓는다. 그렇게 흐름이 넘어간 직후다. (9일 광주, 트윈스-타이거즈 DH 1차전)
원정팀 세 번째 투수가 등판했다. 김진성이다. 간단히 아웃 2개를 잡아낸다. 그리고 최형우가 타석에 들어온다. 초구 포크볼로 스트라이크, 2구째는 직구로 파울을 유도했다. 카운트 0-2에서 3구째. 포수 박동원이 손가락 2개를 펴고 현란하게 흔든다. 포크볼을 떨어트리라는 사인이다. 그런데 공이 약간 높다. 3루 쪽 파울로 커트 된다.
포수는 4구째도 같은 공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특이한 동작을 취한다. 일단 두 무릎을 땅에 꿇는다. 그리고 다리 사이 땅바닥에 미트를 댄다. 여기로 던지라는 얘기다. 타자가 준비하는 중인데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마치 ‘알아도 그만’이라는 배짱이다. 이건 뭐지? 난생 처음 보는 초식이다.
SPOTV 이대형 해설위원이 빵 터진다. “하하하. (박동원이) 미리 블로킹을 하고 있습니다.”
김진성의 포크볼은 정확하다. 포수가 요구하는 곳으로 떨어진다. 최형우는 참기 어렵다. 배트가 시원하게 돌아간다. 헛스윙 삼진, 7회 말이 지워졌다.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박동원은 희희낙락한다. 박경완 코치도 함박 웃음으로 맞는다. 벤치 안은 축제 분위기다. ㅋㅋㅋ, ㅎㅎㅎ, ㅋㄷㅋㄷ. 박수 치고, 등 두들기고, 하이 파이브에. 한껏 기분을 낸다.
박동원의 퍼포먼스는 이유가 있다. 앞선 6회 말이다. 홈팀이 한참 신바람 낼 때다. 트윈스 배터리의 허점을 연신 헤집는다. 이우성이 3루 도루를 성공시켰다. 그리고 김태군의 적시타 때 홈을 밟는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한다. 다음이 문제다. 폭투로 2루까지 간 김태군이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든다. 기습적으로 3루를 훔친 것이다. 화들짝 놀란 송구도 소용없다. 완벽한 세이프다. 통산 도루가 3개뿐인 ‘느림보’에게 허를 찔렸다.
포수에게는 몹시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한참 동안 3루 쪽을 응시한다. 그리고 보복, 혹은 응징이 이뤄진다. 1차는 타석에서 갚았다. 뒤이은 7회 초 공격 때다. 1사 후 임기영의 3구째를 통타했다. 허리를 한껏 젖힌 강렬한 스윙이었다. 타구는 왼쪽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당사자는 이미 스윙과 동시에 결과를 직감했다. 헬멧을 고쳐 쓰고, 배트를 옆으로 던진다. 그리고 잔뜩 눈에 힘을 주며, 천천히 다이아몬드를 일주한다. 홈에 들어오며 포수 김태군과 겹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시즌 20호 홈런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응징이 앞서 얘기한 ‘예고 떨공’이다. ‘미래에서 온 박동원’이라는 제목의 짧은 동영상으로도 화제다. 포크볼이 떨어질 곳을 알고, 미리 미트를 대고 있다는 뜻이다.
아쉽게도 그의 복수는 해피 엔딩이 아니다. 우선 DH 1차전 승리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8회 재역전을 허용한 것이다. 6-5 우세가 6-7 역전패로 뒤집혔다. 고우석의 블론 세이브다. 그리고 이 분위기는 2차전으로 이어진다.
드라마의 절정은 6회 말이다. 홈팀의 무사 만루 찬스. 하필이면 타석에는 대타 최형우다. 1차전 ‘예고 떨공’의 피해자다. 어찌 보면 복수극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인구가 불가능하다. 만루에서 카운트가 2-1로 타자 편이다. 어쩔 수 없다. 승부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포수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가장 단순한 승부를 택한다. 한 가운데 미트를 대고, 운명에 맡긴다.
박명근의 4구째(146㎞ 직구)는 정확하게 요구대로 간다. 스트라이크 존 복판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걸 놓칠 타자가 아니다. 개인 통산 최다타점 기록 보유자의 스윙은 완벽한 타이밍을 만들었다. 큼직한 타구는 우측 담장을 허물어트렸다. 대타 만루홈런. 스코어는 4-5에서 8-5가 됐다. 홈팀의 더블헤더 독식이 이뤄지는 순간이다.
박동원은 타이거즈 팬들에게 아픈 손가락이다. 함께 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사연도 많고, 일도 많았다. 그가 떠난 뒤 한동안 포수난으로 골치를 썩였다. 그때마다 그의 빈자리가 아쉬웠다.
어렵게 모셔(?) 온 인물이 태군마마다. 때문에 둘 사이의 도발↔응징 스토리는 각별하다. 사실 최형우는 이 드라마에서 뜻밖의 희생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극적인 피날레는 그의 손에서 이뤄졌다. 마치 추리물의 기발한 반전과도 같은 결말이다.
/ goorada@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