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백종인 객원기자] 타자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게 스트라이크라고?’ 97마일짜리가 가슴 근처로 왔다. 그런데 구심이 오른손을 번쩍 든다.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분명 높은 볼이다. 벤치도, 관중석도 부글부글 끓는다. “헤이, 맨.” “왓 더….” “부~, 부~.” 온갖 종류의 야유와 욕설이 그라운드로 쏟아진다. (한국시간 8월 22일 샌디에이고 펫코 파크, 파드리스-말린스전)
그렇다. 지금 무척 예민한 상황이다. 스코어 1-0으로는 불안하다. 추가점이 필요하다. 2회 1사 만루다. 여기서 1~2점만 보태면 중반까지는 편안하다. 그래서 다들 신경이 곤두섰다. 타자는 오죽하겠나. 카운트 싸움이 절반이다. 밀리면 낭패다.
그래서 초구 판정에 날 선 반응들이다. 찡그린 타자를 응원하는 연호가 터진다. “하성 킴, 하성 킴.” 하지만 2구째 역시 스트라이크다. 89마일 체인지업이 낮은 존을 통과한다. 이번에는 할 말이 없다.
이제 카운트(0-2)는 완전히 투수 편이다. 병살이나 삼진만 면하면 다행이다. “볼 카운트가 투 스트라이크로 몰리면서, 외야 플라이라도 치겠다는 단순한 생각을 갖고 타석에 임했습니다.” (김하성 경기 후 그라운드 인터뷰)
타자의 타임 요청이다. 타석을 벗어나, 잠시 시간을 갖는다. 리듬을 끊고, 호흡을 정리한다. 그리고 맞은 3구째다. 포수가 사인을 내고 바짝 붙어 앉는다. 97마일짜리 포심이다. 안쪽 코스에 꽉 찬 공이다. 가벼운 스윙이 따라붙는다.
‘빡.’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진다. 공이 찢어질 것 같은 소리다. 타구는 왼쪽 하늘로 날아오른다. 투수, 포수, 그리고 타자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한다. 숨이 멎을 것 같은 찰나의 순간이다.
관중석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얼어붙는다. 중계 화면에 잡힌 백스톱 뒤의 풍경이 다채롭다. 다들 멈칫하는 순간이다. 긴가민가하며 지켜보는 중이다. 한 중년 여성의 반응이 놀랍다. 옆자리 동행과 나누던 대화를 급히 멈춘다. 타구음과 발사 각도(29도), 출구 속도(95마일)로 직감한다.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양손을 번쩍 치켜든다. 이미 결과를 확신한 만세 포즈다.
물론 혼자가 아니다. 몇 미터 옆의 남성 팬도 있다. 저녁 메뉴를 고르던 중이다. 곁에 구내 매점 직원이 주문받는 모습이다. 갑자기 타구를 응시한다. 동시에 오른손을 하늘로 뻗는다. 후련한 소화제를 식전에 삼킨 느낌이리라.
첫 그랜드슬램이다. 커리어 300번째 안타를 멋지게 장식했다. 시즌 17호로 20-20에도 성큼 다가섰다(도루는 현재 28개). 달성하면 아시아 출신 내야수 중 최초가 된다. 타율은 0.280으로 내셔널리그 15위에 랭크됐다. OPS도 0.820으로 높아졌다. 베이스볼 레퍼런스 기준 대체선수대비 승리기여도(bWAR)는 6.0까지 상승했다. ML 전체 4위다.
파드리스도 신이 났다. 구단 SNS에 축하 메시지를 띄운다. 김하성의 이니셜 HSK의 S는 SLAM(그랜드슬램)을 뜻한다는 문구를 적었다. ‘김하성의 MLB 커리어 첫 그랜드슬램’이라는 한글 표기도 잊지 않았다.
비단 기록적인 측면만이 아니다. 기술적으로도 의미심장한 한방이었다.
실전을 보시라. 1사 만루, 볼 카운트는 0-2로 최악이었다. 상대는 3구째 몸쪽 포심 패스트볼을 택했다. 포수 미트의 위치를 보면 높은 코스를 요구한 것 같다. 볼이어도 괜찮다는 의미다. 이를테면 보여주는 공이다. 그다음 4구째 승부구를 위한 목적구다.
아마 그런 설계였을 것이다. 4구째는 체인지업을 낮게 떨어트린다. 그럼 헛스윙, 아니면 내야 땅볼을 유도해 이닝을 끝내겠다. 그런 설계다.
그런데 목적구가 너무도 기가 막혔다. 결코 실투가 아니다. 대단한 투구였다. 좌투수가 우타자 몸쪽 가장 깊은 곳을 찔렀다. 보더라인에 걸친 공이다. 보통이라면 움찔하고 끝이다. 배트도 내밀지 못하는 루킹 삼진이었을 것이다. 설사 스윙이 나와도 파울이나 빗맞은 내야 플라이 정도가 기껏일 공이다.
하지만 이걸 홈런으로 만들었다. 가볍고 빠른, 그러나 극도로 날카로운 컨택이었다. 본인 말처럼 “외야 플라이면 된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돌린 배트였다. 이게 완벽한 타이밍을 만들었다. 가장 치기 어렵다는 97마일(155㎞ )짜리 몸쪽 직구를 담장 너머로 날려 보낸 것이다.
고질이던 빠른 볼 약점을 극복했다. 그리고 절정의 타격감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최근의 상승세를 입증한 결정적 한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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