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25억 원 FA 계약의 마지막 해를 맞아 베테랑의 불꽃을 태우고 있는 김재호(38). 지난 2년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작년 겨울부터 구슬땀을 흘린 결과 은퇴가 아닌 현역 연장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김재호는 지난 19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2023 신한은행 SOL KBO리그 NC와의 시즌 11차전에 2번 유격수로 선발 출전해 3타수 1안타 2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4-1 승리이자 5연패 탈출을 이끌었다.
안타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나왔다. 0-0으로 맞선 5회 2사 1, 3루 찬스였다. 1루주자 조수행이 2루 도루에 성공했고, 타석에 있던 김재호는 KBO 최고 투수 에릭 페디의 4구째 5구째 153km 투심을 받아쳐 1루수와 파울라인 사이로 향하는 절묘한 2타점 선제 2루타를 때려냈다. 결승타를 친 순간이었다.
경기 후 만난 김재호는 “처음 쳐보는 투수라서 첫 타석과 두 번째 타석에 머뭇거렸는데 마지막에 좋은 결과가 있었다. 리그에서 제일 좋은 투수라 확실히 공이 좋긴 하더라”라며 “다른 선수들 또한 많이 힘들었을 텐데 그나마 팀에서 감이 좋은 나한테 찬스가 왔고, 좋은 기운에 힘입어 좋은 안타가 나왔다”라고 미소를 지었다.
김재호의 올해 나이는 38살이다. 1985년생인 그는 2004년 신인드래프트서 두산 1차 지명으로 프로에 입단해 어느덧 20년차를 맞이했다. 그런 김재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올해 양의지(3할2푼3리)에 이어 팀 내 타율 2위(3할1푼8리)를 달리고 있기 때문. 양의지가 부상 이탈해 있으니 두산에서 현재 가장 잘 치는 타자는 김재호다. 커리어 하이를 썼던 2018년(타율 3할1푼1리 16홈런) 못지않은 활약이다.
김재호는 “작년 말부터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준비했다. 그 동안 부상 때문에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는데 캠프에서 자신감만 되찾자는 목표를 가졌다. 다행히 통증이 없는 상태에서 타격할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라며 “올 시즌 초반 경기를 많이 나가지 못해 자신감을 끌어올리지 못했는데 2군에 한 번 다녀온 뒤로 결과가 잘 나와 자신감을 얻었다. 예전 내 모습으로 조금씩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비결을 밝혔다.
실제로 김재호는 어쩌면 커리어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2023시즌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했다. 시작은 호주 스프링캠프였다. 워밍업 때부터 가장 첫 줄에 서서 파이팅을 외쳤고, 수비 훈련을 할 때도 과거 젊은 천재 유격수가 그랬던 것처럼 몸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2년의 야유를 박수로 바꾸기 위해 굵은 땀방울을 흘린 김재호였다.
그럼에도 김재호는 시즌 초반 극심한 슬럼프 속 후배들에게 유격수 자리를 내줬다. 4월 한 달간 타율 1할6푼7리의 부진을 겪으며 5월 5일 유격수 자원 가운데 가장 먼저 2군행을 통보받았다. 그 때만 해도 김재호의 현역 연장은 언감생심이었다.
김재호는 “많이 힘들었는데 어차피 내 나이는 풀타임을 뛸 체력이 안 된다. 그걸 감독님, 구단이 다 아실 것이고, 포스트 김재호를 찾기 위해 많이 노력했는데 이렇게 됐다. 프로는 기회가 오면 결과를 내야 한다. 나 또한 결과를 내야 1년을 더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준비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나한테 기회가 왔다”라며 “다만 아직 내가 주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못하면 다른 후배들이 나와서 열심히 해줘야 한다”라고 되돌아봤다.
1군 말소는 김재호의 천재 유격수 본능을 깨우는 계기가 됐다. 5월 컴백 후 월간 타율 2할7푼3리로 시동을 건 그는 6월 3할2푼5리, 7월 3할3리로 부활을 알린 뒤 8월 들어서도 3할8푼9리로 맹활약 중이다. 타격뿐만이 아니다. 박계범, 이유찬, 안재석 등에 비해 월등히 앞선 수비력을 뽐내고, 베테랑답게 작전 상황에서도 충실히 제 몫을 해낸다.
마침내 아유를 환호로 바꾼 김재호는 “팀이 힘들 때 해결사, 연결고리 역할을 하다보니까 팬들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신다. 그게 기분이 좋다”라며 “요즘 야구하면서 그 동안 못 느낀 행복을 느낀다, 야구장에서 환호를 많이 듣다보니 매 경기 나갈 때마다 행복하다”라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현역 연장 욕심이 있냐는 질문에는 “최선을 다하다보면 구단에서 결정해주실 부분이다”라고 답했다.
다만 김재호가 계속 주전 유격수를 담당하는 건 두산 입장에서 그리 반가운 상황이 아니다. 현재 김재호의 기량이 가장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김재호는 머지않아 두산을 떠날 선수다. 김재호가 현역 생활을 마감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그를 대신할 유격수 자원을 찾아야 한다.
김재호의 생각도 같았다. 그는 “나보다 더 잘하는 선수가 나와야 팀이 더 강해진다”라며 “항상 후배들에게 버티라는 이야기를 한다. 자꾸 2군에 다녀오는 것보다 최대한 1군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해야 한다. 살아남다보면 기회가 오고 그 기회를 잡아야 성장한다. 나 또한 어린 시절 그런 경험을 했다. 여기에 덧붙여 경기를 안 나가도 경기 흐름을 읽는 판단력을 키웠으면 한다. 요즘 후배들은 단순히 잘하려고만 한다. 그래서 안타깝다”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김재호는 남은 시즌 그 동안 팬들에게 받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또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기 위해 지금처럼 베테랑의 불꽃을 태울 계획이다. 현역 생활을 계속 하고 싶은 마음도 크다.
김재호는 “지금 2번타자로 계속 나가는 것도 결국 고참이 풀어 나가야 밑에 애들이 자신감을 갖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보다 행동으로 해야 선수들이 느낀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로 했는데 못하면 팀 분위기가 더 가라앉는다”라며 “남은 시즌도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라고 베테랑의 남다른 품격을 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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