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석양 무렵 바닷가다. 칼을 짚고 주저앉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사내가 보인다. 사내는 피에 절어 있다. 줄지어 밀려오는 금빛 파도 소리가 사내의 호흡처럼 숨가쁘다.
사내는 열망의 자취 하나 없이 외로움만 가득한 눈동자를 들어 고즈넉한 노을을 올려다본다. 그런 사내의 등 뒤로는 수십의 무사들이 칼을 겨누고 다가오고 있다.
문득 사내의 눈동자에 열기가 피어오른다. 사내는 독백한다. “들리는가? 이 소리. 고(鼓)소리.” 사내는 마지막 불꽃이라도 살라버리려는 양 결기 어린 눈매로 주춤하는 무리들을 향해 나아간다.
MBC 금토드라마 ‘연인’(황진영 극본, 김성용·천수진 연출)이 지난 4일 방영을 시작했다. 드라마는 병자호란이란 민족의 수난사에 얽힌 한 남자,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그려낸다. 주인공 이장현 역의 남궁민은 비장미 물씬한 무사의 모습으로 드라마를 열어젖혔다.
드라마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같은 서술구조로 시작했다. 1659년 효종 10년 봄, 사헌부 지평 신이립(하경 분)은 상관으로부터 선세자(소현세자) 승하 후 발견된 사초를 건네받는다. 상관은 사초에 빈번히 등장하는 사내 이장현의 행적을 은밀히 알아보라고 지시한다.
신이립이 살펴본 사초 속 이장현은 ‘군관의 무리 중 군관답지 못한 이’, ‘세자를 미혹하여 그릇된 일에 담기게 한 이’ 등으로 묘사되어 있다. 신이립은 ‘무리 중 하나가 광증을 일으키니 상께서 이르시길 다시는 해를 보지 못하게 하라’라는 대목에 주목한다.
신이립은 그 단서를 따라 혜민서를 방문한다. 혜민서는 은밀하게 광증 환자들을 격리 감호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신이립은 유길채(안은진 분)로 추정되는 광증환자를 만난다. 그녀는 이장현이란 이름에 반응한다. 드라마는 여인의 이야기를 따라 1636년 인조 14년 봄 능군리로 달려간다.
그 해 능군리는 평화로왔다. 농부는 밭을 갈고 규방처자들은 수를 놓고 학동들은 학업에 매진했다. 호사가들의 입초사에 오르는 인물은 단 한 명, 세칭 ‘꼬리 아홉 달린 여시’ 유길채뿐이다.
실제 유길채는 저 이쁜 것 알고 온 동네 유생들의 심사를 쥐락펴락하며 동년배 처녀들의 시샘받기를 즐긴다. 하지만 연정은 오직 성균관 유생 남연준(이학주 분)에게 주고 있다. 공교롭게도 연준은 친구 경은애(이다인 분)의 정혼자다. 하지만 길채는 끊임없이 연준의 사랑을 쟁취하려 한다.
능군리에서 정묘년 호란이 남긴 생채기는 그렇게 아문듯했다. 남연준이 서원 유생들을 모아놓고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칭제한 사실을 밝히며 척화의지를 부추길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한 사내가 개입하면서 능군리가 시끄러워졌다. 한달 전 홀연히 능군리에 찾아든 이장현이 장본인였다. 이장현은 천명이 명(明)나라에 있다는 연준의 말에 반박, 원나라와 금나라를 예로 들며 여진족의 천명은 청에 있다고 강변한다. 원숭환에 의해 누르하치가 목숨을 잃은 사실을 강조하며 ‘변하지 않는 지고지순한 의리가 천명’이라는 연준의 말에는 그 의리를 바친 원숭환이 명황제에 의해 책형 당해 죽은 사실을 거론하며 의리의 허망함을 강조했다.
그렇게 사라진 이장현에 대한 구설이 능군리를 휩쓴다. 구설에 따르면 이장현은 돈으로 서원에 적을 두려한 파렴치한이다. 서당 시제 ‘절(節)’을 두고 한 자도 적어내지 못한 불학무식한 자다. 오랑캐에게 홍시와 남초를 팔아 모은 재물로 공명첩을 산 가짜 양반이다. 전국을 돌며 장사아치 노릇하며 곳곳에 여인네들을 두고 있는 바람둥이다. 최악은 그러면서도 결혼은 안한다는 비혼주의자다.
그 파렴치하고 불학무식하며 가짜 양반인 주제에 바람둥이 비혼주의자인 이장현이 그네 타는 길채를 보았다. 그리고 독백한다. “들리는가? 이 소리. 고(鼓)소리.”
사헌부 지평 신이립에게 건네는 음성도 오버랩 된다. “저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냐고 님께 물었죠. 님께선 기억하다마다 그날 아주 진귀한 소리를 들었거든 하시었죠. 무슨 소리를 들으셨소? 물었더니 분꽃이 피는 소릴 들어본 적 있습니까? 내 그 진귀한 소리를 들었소라 답하셨죠.”.
드라마는 연준을 바라보는 길채와 그런 길채를 해바라기하는 장현의 알콩달콩 스토리 끝에 마침내 병자호란 발발로 2회를 마쳤다.
2회까지에서 묘사된 이장현은 세상이 만만하여 별다른 대책없이 살아가는 남자다. 세상이란 그저 스쳐가면 그 뿐이란 자세를 견지한다. 장현의 심드렁함은 어쩌면 한 번의 생이 감당할 충분한 고통을 이미 겪었기 때문일 수 있다. 그 고통은 9년 전 발발한 정묘호란에서 비롯됐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겪고 나면 널뛰는 감정은 마모되고 가치관은 부질없어 진다. 그런 판이니 연준이 설파한 ‘존명양이(尊明攘夷)’는 가소로울 따름이다. 연모하는 감정 역시 찰나에 불과하고 얄팍한 인간에겐 그런 숭고한 감정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낄만 하다.
그런 그가 한 여인의 그네 뛰는 모습을 보며 뜻밖의 소리를 듣는다. 북소리처럼 둔중한 심장의 고동 소리. 그리고 그 소리는 소리내어 슬퍼하지 못해 오히려 슬픈 눈동자를 선보였던, 이장현으로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 모양이다. 그리고 이장현을 ‘님’이라 칭한 길채(로 추정되는) 목소리에 깔린 회한 역시 한 남녀의 연정이 병자호란이란 세계사적 사건에 매몰돼 비극으로 끝날 것임을 암시했다.
시퍼런 칼날 위에서 분꽃처럼 피어나는 소리, 남궁민과 안은진이 그려낼 애처롭고 아득한 사랑이야기가 궁금해진다.
/zaitung@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