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백종인 객원기자]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다. 2013년 4월의 일이다. 이글스가 우울하던 시절이다. 개막 열흘이 넘도록 승리 소식이 감감하다. 태평양을 건넌 99번 소년 가장은 그 무렵 벌써 2승째를 올렸다. 팬들의 그리움이 더욱 깊어지는 시간이었다.
그러던 대구 출장길이다. 3연전 첫 경기를 허무하게 내줬다. 1회 말에 5실점 하며 무너졌다. 6회 말 스코어가 0-8이었다. 개막 8연패다.
이튿날(4월 10일)이다. 에이스 데니 바티스타의 차례다. 희미한 기대감이 생긴다. 하지만 이번에도 타선이 노답이다. 차우찬에게 철저히 막힌다. 그러다가 4회 솔로포(최형우)를 얻어맞았다. 선취점을 잃고, 비틀거린다. 당시만 해도 라이온즈의 불펜은 철벽이었다. 9연패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한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중계창에 이런 댓글이 달린다. ‘한화는 팬이 없어. 죄다 보살들이지….’ 이제는 국어사전에도 등록된 단어다. 보살팬이라는 말이 생겨날 무렵이다. (이 경기는 6회 이승엽의 3점 홈런이 추가된다. 스코어 4-0으로 끝났다. 이글스의 개막 연패는 ‘13’까지 이어졌다.)
중계 카메라가 관중석을 훑는다. 그러던 중 플래카드 하나가 잡힌다. 이런 문구가 적혔다. ‘한화 이글스 팬분들 힘내세요!’ 게시자는 ‘야구를 사랑하는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팬’으로 돼 있다.
하필이면 또 대구다. 이글스의 원정 첫 경기였다. 홈런 3방이 터진다. 닉 윌리엄스, 정은원, 노시환이 축포를 쏴 올린다. 무려 18년 만의 7연승을 자축하는 불꽃놀이다. 홈팀은 1-6으로 희생양이 됐다. (6월 30일 대구 삼성-한화전)
이 경기 9회 말이다. 승패는 물 건너갔다. 라이온즈 파크는 파장 분위기다. 그런 상황에 중계 카메라가 관중석 한 켠을 줌인한다. 어느 원정 팬의 모습이다. ‘정성스럽게’ 만들어 온 플래카드가 들려 있다.
이렇게 적혔다. ‘삼성 라이온즈 팬분들 힘내세요!’ 13년 전의 데칼코마니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게시자 역시 반대다. ‘야구를 사랑하는 대전 한화 이글스 팬’으로 돼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일화다. 위나라 범저(范雎)의 얘기다. 가난하지만 비범한 재주를 지닌 인물이다. 하지만 섬기던 주군 수가(須賈)로부터 시샘을 받았다. 심한 태형으로 죽기 직전까지 치도곤을 당했다.
이후 진나라로 피신해 재상까지 올랐다. 그리고 위나라를 쳐서 수가에 대한 원수를 갚았다. 사기는 이를 ‘군자보구 십년불만(君子報仇 十年不晩)’이라고 기록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을 참아도 늦지 않는다는 뜻이다.
국제 정치학에서 중국을 이해하는 데 종종 쓰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간혹 인용된다. 간략히 ‘군자의 복수’라고 표현된다. 주로 게임 커뮤니티, 혹은 스포츠 경기에서 등장한다. 오래전 패배를 설욕할 때, 사무친 굴욕을 갚았을 때, 같은 상황들이다.
따지고 보면 이글스와 라이온즈의 경우도 비슷하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팬 카페 여기저기에 박제된 이미지가 떠돌고 있다. 2개의 플래카드가 뒤바뀐 처지를 보여준다. 키워드는 ‘군자의 복수’다. 아쉽게도 상처를 헤집는 말들이 댓글창을 어지럽힌다.
물론 오해일 수 있다. 아니, 그러길 바란다. 13년 전이나, 어제(30일)의 경우나. 게시자의 진의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글자 그대로의, 순수한 의도일 수 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괜히 보는 사람이 삐딱한 것이라고.
같은 야구팬 아닌가. 패했을 때의 아픔, 내려갈 때의 아찔함. 그런 과정은 누구나 겪는다. 그 안타까움을 공감한 것이리라.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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