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백종인 객원기자] 9회가 되도록 승부는 안갯속이다. 1-1로 팽팽한 가운데 홈 팀의 말 공격이 시작된다. 타순이 좋다. 2번 마이크 트라웃의 차례다. 7구 실랑이 끝에 볼넷을 얻었다. 모처럼 선두 타자 출루다. (한국시간 27일 에인절스 스타디움, 시카고 화이트삭스-LA 에인절스)
다음 타자가 등장하자 그라운드가 술렁인다. 3번 오타니 쇼헤이다. 앞선 4회에 이미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여줬다. 오른쪽 관중석 중간에 꽂아버린 솔로 홈런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출구 속도 113마일(182km), 비거리 446피트(136m)짜리 충격적인 한방이었다.
상대 실투도 아니다. 딜런 시즈의 슬라이더였다. 몸쪽 보더라인에 제대로 걸친 공이다. 그걸 완벽하게 받아쳐 만들어 낸 26호째였다. ‘어떻게 저걸 저렇게 치지?’ 맞은 투수조차 실소를 터트릴 정도다.
그런 타자를 9회 말에 만났으니 편안할 리 없다. 화이트삭스 벤치는 타임을 건다. 그리고 마운드를 교체한다. 좌완 애런 부머에게 공을 맡긴다. 그러나 부담감이 오죽하겠나. 바깥쪽, 바깥쪽으로 피하다가 결국 1루 자유이용권을 주고 말았다. 무사 1, 2루로 위기가 깊어진다.
여기부터가 드라마의 시작이다. 4번 브랜든 드루리 타석이다. 영점이 잡힌 부머가 존 안쪽을 공략한다. 1구째 스트라이크, 2구째는 헛스윙을 끌어내며 카운트(0-2)를 앞서간다.
상대가 안도하는 순간이다. 상상도 못한 기습이 펼쳐진다. 에인절스 벤치에서 사인이 나왔다. 두 주자를 향한 더블 스틸 작전이다. ① 세트 모션이 빠르지 않다. ② (시각적으로) 2루 주자를 체크하기 어려운 좌완투수다. ③ 변화폭이 큰 스위퍼를 자주 던진다.
몇 가지 요소가 유리한 것은 맞다. 하지만 무모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그래도 4번 타자가 타석에 있는데. 괜히 잘못되면 얼마나 욕을 먹으려고. 그런 걱정이 앞서는 순간이다.
투수가 오른발을 드는 순간 스타트가 이뤄졌다. 마침 결정구를 던지는 찰나였다. 스위퍼가 급하게 꺾이며 타자를 유혹한다. 그러나 오히려 당한 것은 배터리다. 앞에서 큰 바운드가 튀기며 포수가 블로킹에 실패한다. 두 주자는 다음 베이스로 무혈 입성한다. 공이 빠지기는 했지만, 주자들의 스타트가 먼저다. 이럴 경우 공식 기록은 폭투가 아닌 도루 성공으로 결정된다. 더블 스틸로 1, 2루가 2, 3루로 바뀐다.
여기가 승부의 분기점이었다. 드루리는 다음 공에 삼진으로 물러났다. 그런데 계속된 위기에서 또 한 번 ‘패대기’가 나온다. 이적한 마이크 무스타커스 타석 때 2구째가 뒤로 빠진 것이다. 역시 격하게 휘어진 스위퍼였다. 포수 야스마니 그란달이 막아줬으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했다. 미트에 맞은 공이 몇 걸음 옆으로 흘렀다.
타석에서는 급하게 정지 신호를 보냈다. 무스타커스가 3루에 오지 말라고 손짓했다. 그러나 이미 발동이 걸린 트라웃이다. 막을 방법은 없다. 말 그대로 저돌적 대시다. 폭발적인 스피드로 홈 플레이트를 점령한다. 퇴근을 알리는 벨 소리가 울린다. 홈 팬들의 환호성이 그라운드에 가득하다.
에인절스는 지난 4월에 이어 또 한번 폭투 덕에 행운을 챙겼다. 와일드 피치(wild pitch) 혹은 패스트볼(passed ball)로 연속 끝내기 승리를 거둔 경우는 라이브 볼 시대(1920년) 이후 처음이다. 덕분에 43승 37패로 AL 서부지구 3위로 희망을 갖게 됐다.
한편 이 승부는 색다른 기록으로 화제가 됐다. 9회 말 인플레이 타구 하나 없이 결승점이 만들어진 탓이다. 볼넷과 도루 각각 2개씩. 그리고 상대 투수의 실수로 뽑은 1점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사상 최고가 더블 스틸’라는 특별함이다. 트라웃의 올 연봉은 3711만 달러, 오타니는 3000만 달러다. 둘이 합하면 6711만 달러가 된다. 우리 돈으로 870억짜리 듀오다. 게다가 둘이 받은 MVP만 3번이다. 초 럭셔리 육상부의 활약으로 얻은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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