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백종인 객원기자] 선발 헌터 그린은 여전히 불을 뿜는다. 75번째 공도 100마일(162㎞)을 찍었다. 몸 쪽에 붙인 결정구였다. 7번 잭 스윈스키는 속수무책이다. 맥없이 헛스윙으로 삼진을 먹는다. 원정 팀의 4회 공격은 시작부터 힘겹다. (한국시간 31일, 신시내티-피츠버그 개막전)
다음 타석은 만만한 8번 차례다. 어렵게 갈 필요 있나. 카운트 잡으려는 초구가 가운데로 몰린다. 99마일(160㎞)짜리 레이저다. 그러자 반응이 나온다. 어느 틈에 배트가 따라붙는다. 부드러운 스윙에 제대로 걸렸다. 말끔한 빨랫줄이 반대쪽에 널린다. 좌익선상 2루타다.
그깟 안타 하나쯤이다. 누구나 칠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우는 다르다. 꼼꼼히 따져봐야 할 게 있다. 8번 타자가? 무려 99마일짜리를? 그것도 레그킥을 하면서?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요소들이 가득하다.
일찍이 천재 이치로도 포기한 방식이다. 메이저리그 진출하면서 특유의 진자 타법을 버렸다. 오른발이 너무 요란하면 빠른 볼 대처가 어렵다. 그걸 체감했기 때문이다. 파워를 포기하는 대신 정확성에 집중하려는 전략이다.
이정후도 비슷하다. 시즌 후 미국 진출을 선언했다. 이를 위해 스윙을 바꾸는 중이다. 비단 이들 뿐만이 아니다. 아시아권 타자들 대부분이 비슷하다. 가장 먼저 레그킥의 사이즈를 줄인다. 그런데 이 8번 타자는 당돌하다. 다리를 한껏 끌어올린다. 자칫 가슴에 닿을 정도다. 이런 킥으로 100마일을 때려낸다. 아무렇지 않게.
맹랑함은 끝나지 않는다. 누상에 나가서 한층 더 도발적이다. 일격을 맞은 투수의 초구였다. 또 한 번 100마일이 뿜어졌다. 동시에 2루에서도 번개가 번쩍인다. 거리낌 없는 스타트다. 3루를 향해 폭주가 시작된다.
포수(타일러 스티븐슨)는 화들짝 놀란다. 이미 일어설 틈도 없다. 급하게 앉아 쏴로 대응한다. 하지만 턱도 없다. 일단 방향이 틀렸다. 옆으로 빗나가며 태그조차 못 해본다. 완벽한 세이프다. 1사 2루는 1사 3루로 바뀐다.
이 때 부터다. 잘 나가던 개막전 선발이 흔들린다. 다음 타자(오스틴 헤지스)에게 볼넷을 내주고 쫓겨난다. 마운드는 그러고도 진정이 안된다. 계속된 볼 잔치다. 볼-볼-볼…. 만루에서도 마찬가지다. 밀어내기로 2명이 홈을 밟았다. 게다가 폭투까지 나왔다. 또 한 점이 공짜다. 3점 잭팟이 터졌다. 스코어 1-1은 4-1로 뒤바뀐다. 모든 게 ‘만만한 8번 타자’부터 시작된 일이다.
당초 (포수) 스티븐슨은 견줄 상대가 아니다. 팝 타임(pop time)으로 따져보자. 포수 미트에 ‘팡(pop)’ 하는 순간부터 송구가 수비수 글러브에 꽂힐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의 기록은 리그 전체에서 중하위권이다. 3루까지가 1.63초(43위, 2021년. 2022년은 기록 없음). 2루 팝 타임은 1.94초(17위)가 걸린다. 통산 도루저지율은 22.9%(허용 64, 저지 19)이다.
반면 당돌한 8번 타자는 육상부 출신이다. 20-80 스케일 중 주루능력이 70을 기록했다. 리그 평균(50)를 훨씬 뛰어넘는다. 그야말로 엘리트 수준이다. 한때 100미터를 10초대에 주파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지난 해 번트 안타 때는 1루 도달 시간이 3.65초를 끊었다. 2018년 스탯캐스트 측정 이후 최고치였다.
이런 스피드는 8회에 또 한 차례 빛을 발한다. 선두타자로 나가 볼넷을 얻었다. 그리고 곧바로 2루 도루를 성공시킨다. 포수는 허겁지겁이다. 공을 빼려다 놓치는 실수까지 범한다. 던져보지도 못한 채 베이스를 내줘야 했다.
이번에도 4회(3루 도루)와 마찬가지다. 망설임 따위는 전혀 없다. 눈치 볼 것도 없다. 초구부터 달린다. 마치 무조건 산다는 자신감이다. 덕분에 팀은 결승점을 얻는다. 후속 희생 번트(헤지스)에 이어 희생플라이(크루즈)도 4-4의 균형을 깨트린 것이다. (배지환은 작년 9월 데뷔 후 5번 도루 시도를 모두 성공시켰다. 이 중 3번이 초구였다.)
mlb.com은 개막전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Top Performers’ 3명을 꼽았다. 홈런을 친 크루즈와 스티어, 그리고 ‘만만한 8번타자’ 배지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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