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전에 제가 나갈까요?”
농담처럼 던진 말이 현실이 됐다. 2009년 도쿄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무대 한일전 8실점 콜드게임의 설욕전이 한국의 최대 위위기에서 성사됐다.
한국은 지난 9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호주와의 WBC 1라운드 B조 1차전에서 7-8로 패했다. 이로써 한국은 8강 진출의 7부 능선을 넘지 못하고 복병에 발목이 잡혔다. 8강행에는 먹구름이 드리웠다. 호주전 필승이라는 1차 목표가 어긋나면서 이제 한일전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로 변했다.
그 부담을 투수조 최고참 김광현이 짊어지게 됐다. 이강철 대표팀 감독은 호주전이 끝나고 김광현을 선발 투수로 예고한 배경에 대해서 “연장 승부치기 갔으면 김광현까지 투입 했을 것이다. 7회부터 김광현을 한일전 선발로 생각하고 있었다. 초반에 끌어줄 투수는 베테랑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경험있는 투수를 선택했다”라면서 “잘 끌어주기를 바라면서 선택했다”라고 밝혔다.
현역 중 유일하게 ‘일본 킬러’ 계보에 포함된 김광현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본선 풀리그에서 5⅓이닝 1실점을 기록했고 준결승전에서 8이닝 2실점을 하면서 ‘일본 킬러’ 반열에 올라섰다. 그러나 이후 한일전 성적이 좋지 않았다. 베이징 올림픽의 기억을 안고 다시 나선 2009년 WBC 대회 한일전에서는 1⅓이닝 7피안타 8실점을 헌납했다. 일본의 현미경 분석을 당해내질 못했고 결국 한국은 2-14, 7회 콜드게임으로 패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 한일전 등판은 지난 2015년 프리미어12 개막전으로 2⅔이닝 2실점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한일전에 웃기도 했고 좌절하기도 했다. 그래도 김광현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경기들 역시 한일전이었다. 2008~2009년 베이징 올림픽과 WBC를 관통하던 시기에 김광현은 막내급이었다. 하지만 15년 가까이 지난 현재 김광현은 투수조 최고참으로 팀을 이끌어야 하는 존재가 됐고 후배들이 우러러보는 우상이 됐다.
젊은 투수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일전의 무게감과 분위기, 부담감을 오롯이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선수는 김광현 뿐이다. 현재 투수진의 무게추가 젊은 투수들 쪽으로 옮겨갔지만 여전히 김광현의 존재감과 아우라는 무시할 수 없고 일본 언론들 역시 김광현의 존재를 경계하고 있다.
그는 도쿄 입성 이후 첫 훈련날이던 지난 8일, 취재진과 자리에서 한일전 질문에 "제가 한일전 나갈까요?"라고 취재진을 향해 농담을 던진 뒤 "제가 운이 좋게 계속 한일전 등판 기회가 주어졌는데 잘 던질 때도 있었도 못 던질때도 있었다"라면서 "만약 한일전에 다시 나간다면 최선을 다해서 던질 것이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예선전에 만나고 결승전에서 일본을 또 만나고 싶다. 그때 던지겠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빠른 본선 조별라운드에서 김광현의 한일전 등판을 예고했다. WBC 무대에서 14년 전의 아픔을 설욕할 수 있는 기회다.
김광현의 선발 매치업 상대는 다르빗슈 유가 확정됐다. 다르빗슈와 한국이 만난 것은 역시 14년 전인 2009년 WBC였다. 당시에는 다르빗슈를 어느 정도 공략했다. 1라운드 조 1위 결정전에서 다르빗슈는 중간계투로 등판해 1이닝 1피안타 1볼넷 3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다.
이후 2라운드 2차전에서 다르빗슈는 한국을 상대로 5이닝 4피안타 1볼넷 7탈삼진 3실점(2자책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패전투수. 대망의 결승전에서 한국은 2-3으로 뒤진 9회 다르빗슈를 공략해 3-3 동점을 만들며 다르빗슈에게 블론세이브를 안겼다. 하지만 연장 10회 한국은 실점했고 다르빗슈는 블론세이브를 극복하면서 우승 확정 투수가 됐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한국 타선이 다르빗슈를 공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김광현이 마운드를 얼마나 버텨주는 지가 최대 관건이다. 김광현 입장에서는 다시금 이를 악 물어야 한다. 과거 아픔을 치유하고 팀의 WBC 탈락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극복해낼 수 있을까. 김광현의 어깨에 또 다시 무거운 짐이 얹어졌다. /jhrae@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