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87세를 일기로 작고한 고(故) 김영덕 전 감독은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빠질 수 없는 선구자였다. 재일교포 출신 투수로 일본프로야구를 거쳐 1964년 한국에 건너온 김 전 감독은 1969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한국야구에 처음으로 슬라이더를 선보인 투수가 김 전 감독이었다. 선수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 명성을 쌓았다. 한일은행, 장충고, 북일고 감독을 거쳐 1982년 KBO리그 원년 OB(현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1983년까지 OB를 지휘한 뒤 1984~1986년 삼성, 1988~1993년 빙그레(현 한화) 감독을 지내며 11시즌 통산 1207경기 707승480패20무 승률 5할9푼6리를 기록했다. 1985년 삼성의 통합 우승을 이끌면서 KBO 최초 500승, 600승, 700승을 달성했다. 707승은 KBO리그 역대 감독 최다승 7위 기록. 1000경기 이상 지휘한 역대 감독 12명 중 최고 승률이기도 하다. 김태형 전 두산 감독(645승484패19무 .571)이 승률 2위.
해태, 삼성에서 우승한 김응용 전 한화 감독과 함께 유이하게 2개 팀에서 우승한 김영덕 전 감독에게 빙그레 시절은 깊은 한(恨)으로 남아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6년간 415승294패17무(.585)로 이글스의 전성기를 이끈 김 전 감독은 1989년, 1992년 두 번의 페넌트레이스 우승 포함 한국시리즈 4회 진출에도 불구하고 4번 모두 준우승으로 끝났다. 해태에 3번, 롯데에 1번 막혔다.
빙그레를 끝으로 1군 감독 커리어를 마감하면서 김 전 감독에게는 ‘비운의 명장’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다. 생전 김 전 감독은 “북일고부터 빙그레까지 11년간 한화 밥을 먹은 사람이다. 다른 팀보다 한화에 더 눈길이 가고 정이 간다”며 “빙그레를 4번이나 한국시리즈에 올렸지만 4번 다 깨졌다”고 아쉬워했다. 김 전 감독과 함께 빙그레 전성기를 함께했던 선수들에게도 마음의 빚이다.
북일고부터 빙그레까지 김 전 감독과 인연이 오래된 ‘제구력의 마술사’ 이상군(61) 북일고 감독은 거제에서 전지훈련 중 서울 빈소를 찾았다. “내게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고등학교 진학할 때 신일고, 충암고에서 나를 데려가려 했는데 일본에서 야구를 하셨고, 투수 출신이신 김영덕 감독님께 배우기 위해 아버지가 북일고로 보냈다”고 떠올린 이상군 감독은 “프로에서도 창단한 지 얼마 안 된 빙그레를 단기간 한국시리즈에 올려놓으실 정도로 지도력이 대단하셨다. 특히 장기 레이스 운영을 잘하셨고, 한국시리즈에도 4번이나 올랐는데 우승 한 번을 못했다. 진짜 아쉽고, 감독님께 죄송한 마음밖에 없다. 그때 당시 해태가 워낙 강했다”고 돌아봤다.
역시 북일고에서 처음 김 전 감독을 만나 빙그레에서 연습생으로 재회, 통산 120승 투수가 된 한용덕(58) 전 한화 감독도 “김영덕 감독님은 한국야구에 많은 업적을 남기신 분이다. 빙그레 때 준우승으로 감독님이 조금 평가절하받는 부분이 아쉽다. 원년에 한국시리즈 우승도 하셨고, 빙그레에선 나뿐만 아니라 정민철 전 한화 단장처럼 처음에 주목받지 못한 무명 선수들도 많이 키워내셨다. 세세한 부분들까지 신경써주신 은인 같은 분이다”고 떠올렸다.
빙그레 에이스로 활약하며 KBO리그 역대 통산 최다승(210승) 기록을 갖고 있는 송진우(57) 전 스코어본 감독도 “해태 투수들이 너무 좋아서 빙그레에선 우승을 하지 못하셨지만 김영덕 감독님은 한국야구의 선구자 역할을 하셨다. 한국프로야구가 잘 정립되지 않았을 때 감독님이 그 당시 일본의 선진야구를 도입하며 선수들을 세심하게 가르쳐주셨다”고 말했다.
김 전 감독은 섬세한 관리형 지도로 초창기 한국야구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이상군 감독은 “일본에서 야구를 하고 오신 만큼 디테일이 남달랐다. 그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수비 포메이션과 팀플레이를 배웠다. 훈련할 때는 절대 타협이 없으셨다. 훈련량이 많으셨지만 그만큼 선수들의 체력, 정신력을 강하게 키우셨다. 북일고나 빙그레가 단기간 강팀이 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설명했다.
져주기 게임, 기록 밀어주기 논란으로 냉혈한 승부사 이미지가 강한 김 전 감독이지만 제자들은 ‘정 많은 스승’으로 기억한다. 한용덕 전 감독은 “조금 엄하셨지만 선수들에겐 큰 산과 같은 분이셨다. 선수가 크는 데 있어 시간을 갖고 배려해주시면서 클 때까지 믿어주셨다”며 “북일고 1학년 때 감독님과 1년을 함께한 뒤 빙그레에서 다시 만났다. 1학년 때 조그마한 체구였고, 중간에 야구를 그만둔 뒤 한참을 못 뵈었는데 (1987년 연습생 입단 때) 한 번에 알아봐주셨던 기억이 있다. 정 많고 세심한 분이셨다”고 떠올렸다.
송진우 전 감독도 “감독님이 빙그레에서 마무리하실 때 내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듯한 모습이 기억난다. 너무 많이 던지게 해서 미안한 마음이 있으셨던 것 같다. 지금 기준에서 이닝수나 투구수를 보면 혹사라고 말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던지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때 감독님께 여러 가지 잘 배운 영향이 크다”고 회상했다.
빙그레 제자들은 스승의 날이나 때가 되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김 전 감독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곤 했다. 최근까지도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상군 감독은 “작년 11월이 마지막 전화였다. 그때도 목소리가 쩌렁쩌렁 하셨는데 최근 급격히 안 좋아지셨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한용덕 전 감독은 “작년에도 감독관을 하면서 수원 야구장에 찾아오신 감독님을 뵈었다. 설 명절을 앞두고 전화를 드렸는데 안 받으시길래 다음에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감독님 아드님으로부터 (부고) 문자가 왔다. 워낙 건강하셔서 생각도 못했다”며 스승의 갑작스런 별세에 안타까워했다.
송진우 전 감독도 “감독님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최근 통화할 때도 자식들에게 피해를 안 끼치고 명대로 살겠다면서 강한 모습을 보이시곤 했다”며 “프로야구가 이렇게 성장하는 데 이어 정말 큰 역할을 하셨다. 후배들에게 존경받아야 할 감독님의 공로를 KBO나 한화 구단에서도 잊지 않고 챙겼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waw@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