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더 굴욕을 느끼도록…” 이치로의 WBC에 대한 소름 끼치는 얘기
OSEN 백종인 기자
발행 2023.01.24 13: 25

[OSEN=백종인 객원기자] 그 때는 그랬다. 온 나라가 실의에 빠졌다. 공 하나 때문이다. 2009년 WBC 결승전이었다. 3-3이던 연장 10회 초다. 2사 2, 3루. 타석에 이치로가 등장했다. 마운드에는 창용불패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 실랑이가 벌어진다. 거듭된 파울이다. 카운트 2-2. 운명의 8구째다. 포크볼이 어정쩡하게 몰렸다. 타자가 누군가. 통할 리 없다. 번개 같은 반응이다. 오차 없이 정확하다. 반사된 타구는 빨랫줄이다. 중견수 앞 적시타. 2명의 주자가 홈을 밟는다. 우승의 향방이 갈렸다.
이 장면은 커다란 논란을 불렀다. ‘굳이 왜 승부했냐’는 의제였다. 한동안 TV, 라디오의 단골 메뉴였다. 특집 다큐멘터리는 물론이다. 심지어 ‘100분 토론’에도 등장했다. 술자리에서는 오죽했겠나. 말싸움에 주먹다짐, 경찰차 타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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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자들의 후회도 뼈저리다. 각종 인터뷰를 통해 전해진 발언들이다.
“내가 살피지 못한 탓이다. 더 확실하게 사인을 냈어야 했다. 결승타를 맞은 건 임창용 잘못이 아니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가르치는 사람의 책임이다.” (김인식 전 감독)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감독님은 양손 검지를 흔드는 사인을 전달했다. 볼넷을 줘도 좋다, 힘들게 승부하라는 의미인지 몰랐다. 상대가 상대라서 나름 어렵게 가려고 했지만 내 잘못으로 창용 선배의 포크볼이 가운데로 몰리면서 결승타를 내줬다.” (포수 강민호)
“이치로를 볼넷으로 거르라는 사인 자체가 없었다. 어차피 실투 하나로 그렇게 지게 됐다. 그럼 내 잘못이다.” (투수 임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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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넘었다. 하지만 기억에 생생한 일이다. 승자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한 유튜브 채널이다. SMBC닛코쇼켄(日興証券)이라는 증권회사가 제작했다. ‘가르쳐주세요. 이치로 선생님(おしえて!イチロー先生)’라는 제목이다. 배경은 학교 교실이다. 주인공은 교사 역할이다. 학생은 어린이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이들의 질문에 선생님이 답변하는 형식이다. 2020년 27편이 업로드 됐다.
그 중 한 에피소드다. ‘감정을 억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부제가 붙었다. 학부모 한 명의 질문이다. “개구장이 아들을 키우고 있다. 너무 말을 안 듣는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화를 내게 된다. 선생님은 어떻게 감정을 억제하셨나.”
여기에 대한 교사(이치로)의 대답이다.
“감정적으로 된다는 것은 진 것이다. 결론적으로 무조건 진다. 냉정한 사람한테는 이길 수가 없다. 야구는 안타를 치면 기분이 무척 좋다. 하지만 상대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 별 볼 일 없는 선수로 비춰진다. 즉, 상대가 봤을 때 ‘이 녀석 고작 이 정도 가지고 좋아하기는’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럼 재미없다. 하지만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선수를 볼 때는 ‘이런 상황에서 안타를 쳤는데, 안 좋아해?’ 하면서 의아함을 갖게 된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런 걸 의식하면서, 기분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구체적인 예를 든다. 하필이면 문제의 장면이다. 100분 토론에도 나왔던 순간 말이다.
“2009년 WBC 기억하시는 분들 있을 것이다. 마지막 결승 한국전에서 안타를 쳤을 때다. 달려 나가면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 지 생각했다. 덕아웃을 보면 분명 우리 팀 모두가 기뻐하고 있을 게 뻔하기 때문에 보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보게 되면 나도 상응하는 반응을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야 그럴 수 있다. 다음 얘기가 놀랍다. 소름이 끼칠 정도다.
“상대에게 있어서 가장 굴욕적인 게 뭘까. 그건 내가 기뻐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행동을 했을 때, 상대가 ‘진짜 이 녀석한테는 안되는구나’라는 마음을 갖는다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눈 앞에서 일어난 일의 다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비교적 냉정해질 수 있다.”
이치로가 2009년 결승전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 SMBC日興証券 캡처
그의 입은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30년 발언’이다. “상대가 30년 동안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2006년 첫 WBC를 앞두고 나온 멘트다. 이를 놓고 한국 여론은 들끓었다. 건방짐을 넘어 ‘망언’으로 규탄됐다.
후에 와전된 것으로 밝혀졌다. 본뜻과 다르게 곡해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적절하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넘치는 표현이다. 지나치게 공격적이다. 오해를 부르기 십상이다.
‘가르쳐주세요…’의 경우도 그렇다. 얘기는 알겠다. 감정조차 철저해야 한다. 뭐 그런 뜻이리라. 실제 경기 때도 그랬다. 결승타를 치고 2루에 안착했다. 일본 선수들은 난리가 났다. 모두가 그를 향해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혼자만 무표정이다. 전혀 내색 않고 냉정을 유지한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건 좋다. 특유의 장점일 수 있다. 그러나 부적절한 표현은 의미를 훼손시킨다. 굳이 굴욕이라는 단어를 동원했다. “상.대.에.게. 가.장. 굴.욕.적.인.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相手にとって 一番屈辱は何かと考える)”라는 대목이다. 이번에 이기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앞으로도 엄두를 못 내게 하리라. 그런 의도가 담겼다. 30년 발언과 다르지 않은 논리다.
금도(襟度)라는 말이 있다. 흔히 禁度의 의미로 쓰인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의 본뜻은 다르다. 襟은 옷깃(앞섶)을 말한다. 度는 넓은 마음과 깊은 생각을 가리킨다. 옷깃이 넓으면 그만큼 품을 수 있는 게 많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치로의 의식은 금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 맞다.
칼럼니스트 일간스포츠 前 야구팀장 / goorada@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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