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안타 1실점, 세번째 완투승
[OSEN=백종인 객원기자] 11월 3일은 일본의 휴일이다. 문화의 날(文化の日)로 불린다. 한국과 같은 만화의 날이기도 하다. 쉬는 날인데 분쿄구 일대가 시끌시끌하다. 도쿄돔이 자리한 곳이다. 특별한 이벤트가 열린 날이다.
고교야구 여자선발 대 고베 치벤이라는 팀의 일전이다. 여고 선발은 알 법하다. 상대는 뭔가. 고베 치벤? 따지고 보면 그냥 동네야구 팀이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일반인 아저씨들이다. 사회인 야구보다 훨씬 낮은 레벨이다.
하지만 그 ‘몇몇’이 문제다. 바로 전설 스즈키 이치로(49)의 팀이다. 그가 구단주, 감독, 코치, 에이스, 투타 겸업까지. 혼자 다 해 드신다. 이번에는 초대 손님까지 불렀다. 마쓰자카 다이스케(42)다. 은퇴한 170승 투수는 4번타자, 유격수로 출전했다.
일단 결과부터 소개한다. 고베 치벤의 완승이다. 스코어 7-1. 선발 이치로가 9회까지 완투했다. 투구수 130개. 최고 131㎞의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를 선보였다. 피안타 2개, 삼진 14개를 잡았다.
자신의 전공인 타격(9번 타자)에서는 망했다. 안타 없이 내야 플라이 1개, 땅볼 3개가 전부다. 병살타도 1개 기록했다. 반대로 마쓰자카는 중심 타자의 면모를 지켰다. 4타수 3안타 1타점. 안정감 있는 수비도 보여줬다.
여고생에게 90도 인사하는 반백의 전설
여고 선발 대 고베 치벤의 경기는 올해가 두번째다. 1차전은 작년 12월에 열렸다. ‘여자선발팀 강화 프로그램’이라는 명목이었다. 당시도 투수는 백넘버 1번 이치로다. 9회까지 마운드를 도맡았다. 최고 135㎞. 안타 4개, 4사구 4개를 허용했지만 실점은 없었다. 1-0 경기의 완봉승이다.
50을 코 앞에 둔 나이다. 무려 147개를 던졌다. 멀쩡할 리 없다. 종아리에 통증이 올라왔다. 8회부터는 다리를 절뚝인다. 던지고 쓰러지는 경우도 생겼다. 손가락엔 마비가 왔다. 공 하나를 던지고, 손을 쥐락펴락한다. 그러면서도 마운드를 지켰다.
“이런 긴장감은 WBC 이후 처음이군요. (종아리 통증에 대해) 선수 때도 안 겪었던 일인데…. 한계를 느끼며 플레이했습니다. 내 자신에게도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경기 후 이치로의 소감)
그는 타자를 두 번 맞췄다. 공교롭게도 피해자는 1명이다. 4번타자 가미노 히야카다. 2회는 옆구리, 4회는 팔에 맞았다. “이치로 선생님이 던진 공이잖아요. 영광이고, 기쁘게 생각합니다.”(피해자)
첫번째 134㎞짜리가 옆구리를 직격했다. 타자는 웃으며 깡총깡총 뛴다. 하지만 마운드는 당혹감이 역력하다. 모자를 벗고 90도로 숙인다. 반백의 전설이 여고생 타자에 머리를 조아린 것이다.
작년에도, 올해도 공중파 TBS-TV가 전국에 생중계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무대다. 그 때는 고베 호토모토 필드였다. 오릭스의 홈구장이다. 올해는 판이 커졌다. 무려 도쿄 돔이다. 일본인들이 동경하는 곳이다. 3년 전 자신의 은퇴 경기 장소이기도 하다.
“1회 3루타를 맞고 실점한 뒤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야, 직구만으로는 안되겠구나.’ 그래서 슬라이더를 섞기 시작했어요. 사실 투구 훈련을 제대로 한 것은 8월부터죠. 작년에 147개를 던진 뒤로 어깨에 탈이 나서, 팔이 올라가질 않았어요. 긴장하며 열심히 던졌습니다. 마지막 타자를 상대하고 난 뒤 비로서 마음이 놓이네요. 몸은 엉망이지만, 뭔가 해냈다는 만족감이 생깁니다.” (3일 경기 후 이치로의 소감)
손목 비틀기 같은 게임의 탄생
4년 전 이맘 때다. 고교야구 지방대회가 열렸다. 고시엔 대회의 지역예선 격이다. 승부는 일찌감치 났다. 12-0의 일방적인 스코어다. 5회를 넘기기 어렵다.
하지만 관중석은 다르다. 여전히 뜨겁다. 패자들의 응원 덕이다. 지리멸렬한 스코어와는 정반대다. 수백명의 재학생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씩씩한 밴드에 맞춰 함성과 갈채를 쏟아낸다. 열정은 고스란히 그라운드로 전달된다. 끝까지 이를 악문다. 무조건 전력 질주다. 공 하나에 몸을 던진다. 뻔한 패배 앞에서도 포기나 좌절은 없다.
그 현장을 끝까지 지켜본 사람이 있다. 자율훈련 중이던, 은퇴를 목전에 둔, 명예의 전당을 예약한, 살아있는 전설이다. 아마도 가장 순수했던 시절, 야구라는 스포츠의 본질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뒤. 동네야구 한 판이 열렸다. 당시 패자였던 학교의 교직원 팀과의 일전이다. 와카야마 치벤학원이라는 곳이다. 사실 주연은 관중석이다. 감동을 줬던 응원단이 모두 초대됐다. 밴드와 치어리더, 그리고 전교생이 함께 했다. 이치로 팀의 이름은 고베 치벤으로 정했다. 고베는 친정팀 오릭스의 본거지다. 당연히 게임은 일방적이다. 14-0. 그의 첫 승이자, 첫 완봉승이다.
이치로가 하고 싶은 얘기
얼핏 보면 기이한 일이다. 손목 비틀기 같다. 메이저리그까지 평정한 수퍼스타다. 아무리 은퇴했어도, 여고생은 상대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큰 판을 벌인다. 이벤트니까? 그건 맞다. 하지만 대충대충은 없다. 웃음기가 쏙 빠진다. 1구, 1구에 혼이 실린다. 땀을 비오듯 쏟는다. 그야말로 죽기살기, 진검승부다.
“1점이라도 뽑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네요. 레벨이 완전히 다르군요. 이치로 상의 공은 우리가 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서 상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첫번째 경기 상대팀 감독 후지타 기요시)
“이치로 상이 전력으로 플레이해 줘서 감동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이런 귀중한 경험을 살려갈 것으로 믿습니다.” (여고 선발팀 감독 나카지마 리사)
최선을 다하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 자기 일에 모든 것을 바치는 것. 평생 그가 해온 일이다. 그게 이 게임을 통해서 그가 하고 싶은 얘기다.
에필로그 - 치벤(智辧) 학원은 1964년 간사이 지역에 설립된 사학재단이다. 와카야마, 나라 지역에서 8개 초중고교를 운영한다. 설립자는 고인이 된 후지타 테루키요 씨다. 그는 1975년부터 학생들의 수학여행지로 한국을 택했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속죄하는 마음’과 ‘일본문화의 원류는 한국(신라와 백제)’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이후로 40년 이상, 총 2만 명 넘는 학생이 경주를 다녀갔다.
칼럼니스트 일간스포츠 前 야구팀장 / goorada@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