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순간을 만들어주자.”
슈퍼스타의 자질을 단 번에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 브라이스 하퍼(30)가 역전 결승포로 팀의 월드시리즈 진출을 이끌었다. 하퍼의 한 방은 결연한 각오에서 뿜어져 나온 결과물이었다.
필라델피아는 24일(이하 한국시간) 미국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 시티즌스뱅크 파크에서 열린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 5차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경기에서 4-3으로 역전승을 거뒀다. 이로써 시리즈 전적 4승1패를 만든 필라델피아는 지난 2009년 이후 13년 만에 월드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단연, 이날의 주인공은 슈퍼스타이자 리더 하퍼였다. 하퍼는 전날(23일) 시리즈 4차전에서 6-6 동점이던 5회말 역전 적시 2루타를 뽑아내며 분위기를 끌어올려 승리를 이끌었다. 시리즈의 마지막이 될 수 있었던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2-3으로 뒤진 8회말 무사 1루에서 샌디에이고 철벽 불펜 로버트 수아레즈의 98.9마일(약 159km)의 바깥쪽 싱커를 밀어쳐서 좌월 역전 투런포를 쏘아 올렸다. 월드시리즈 진출을 확정 짓는 결정적인 홈런포였다.
하퍼 입장에서는 그 누구보다 간절했을 월드시리즈였다. 2010년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순위로 워싱턴 내셔널스의 지명을 받았고 2012년 데뷔한 뒤 한 번도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지 못했다. 지난 2019년 시즌을 앞두고 하퍼는 워싱턴을 떠나서 필라델피아와 13년 3억 3000만 달러(약 4750억 원)의 대형 계약을 체결했다. 워싱턴은 당시 후안 소토(현 샌디에이고)라는 초특급 유망주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하퍼에 큰 미련이 없었다. 대신 비슷한 시기 입단한 스티븐 스트라스버그와 대형 계약을 체결했다. 공교롭게도 하퍼의 대체자였던 소토가 활약하고 스트라스버그가 인생투를 펼치면서 2019년, 워싱턴은 프랜차이즈 역사상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다. 하퍼는 더욱 씁쓸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올해 팔꿈치 부상, 손가락 골절 등 잦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투혼으로 경기에 나섰고 99경기 타율 2할8푼6리(370타수) 18홈런 65타점 11득점 OPS .877의 기록을 남겼다. 시즌 아웃이 될 법한 상황을 극복하고 하퍼는 리더로서, 슈퍼스타로서 품위를 지켰고 결국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월드시리즈 진출까지 이끌었다. 필라델피아가 포스트시즌 6번 시드를 받은 것을 감안하면 쾌거나 다름 없다.
와일드카드 시리즈, 디비전시리즈, 챔피언십시리즈까지 11경기 타율 4할1푼9리(43타수 18안타) 5홈런 11타점 OPS 1.351로 맹타를 휘둘렀다. 챔피언십시리즈에서는 타율 4할(20타수 8안타) 2홈런 5타점 OPS 1.25으로 시리즈 MVP까지 수상했다.
MLB.com은 ‘하퍼가 8회 타석에 들어서기 전, 케빈 롱 타격코치에게 ‘기억할만한 순간을 만들어주자’라고 말했다’라면서 ‘필라델피아는 아무도 6번째 경기를 치르고 싶지 않았다’라면서 하퍼를 비롯한 필라델피아 선수단이 필사적인 각오였다고 설명했다.
하퍼는 “우리의 장소에서 월드시리즈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단한 기회지만 그 기회에 감사해야 한다. 타석에 감사한 마음으로 들어선다면 결과가 어떻게 흘러가든 상관 없다”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하퍼의 마음가짐은 타석에서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연결됐다. 샌디에이고의 수아레즈-오스틴 놀라 배터리가 던진 회심의 유인구를 하퍼는 참아낸 것. 하퍼는 1볼 2스트라이크에서 3구 연속 파울로 커트했다. 그리고 수아레즈의 6구 째 스트라이크 존에서 떨어지는 91.5마일 체인지업을 참아냈다. 포수 놀라는 이 장면을 보면서 “믿을 수 없었다”라면서 “스윙을 해야 하는 공이었다. 수아레즈는 최고의 공을 던졌고 하퍼는 그 공을 인내심있게 참아냈다”라고 설명했다.
롭 톰슨 감독은 “슈퍼스타가 왔고 그의 경기를 펼쳤다. NLCS MVP가 된 이유다. 때때로 슈퍼스타들이 해결하지 못한 경우도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해결했다”라고 칭찬했다.
에이스 잭 휠러는 “우리는 항상 그를 ‘쇼맨’이라고 불렀다. 항상 큰 무대에서 해결한다. 그래서 계약을 한 것이다. 그는 중요한 순간에 나서는 면이 있다. 항상 그런 선수”라고 치켜세웠다.
이제 하퍼는 데뷔 후 첫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는다. 휴스턴 애스트로스, 뉴욕 양키스 승자를 기다린다. 과연 하퍼의 슈퍼스타 본능은 월드시리즈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jhrae@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