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선발팀이 100년 만에 한국 땅을 다시 밟는다.
KBO 발표에 따르면 “오는 11월 부산과 서울에서 ‘MLB 월드 투어: 코리아 시리즈 2022’ 친선 4경기를 열” 계획이다. KBO 리그 출범 40주년과 MLB 월드 투어의 일환으로 갖게 된 이번 이벤트 경기는 11월 11, 12일 부산 사직야구장과 11월 14, 15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각각 2경기씩 열릴 예정이다.
아직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MLB를 대표하는 각 구단 선발 선수단이 한국에 방문해 경기를 갖는 것은 1922년 이후 무려 100년 만이다. 이 친선 경기의 성사는 아득한 옛날인 1922년 MLB 선발팀 방한 경기의 추억을 자연스레 불러낸다.
필립 질레트(1872-1938)라는 미국인 선교사가 황성기독청년회(현 서울 YMCA) 회원들을 상대로 ‘베이스볼(BASEBALL)’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은 1904년이었다. 여러 견해가 있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문헌을 종합해보자면 조선 땅에 야구라는 외래 종목이 본격적으로 발을 내디딘 해를 ‘1904년’으로 간주하는 것을 뒤집을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없다.
그야 어찌 됐든, 초창기 야구인들의 간절한 소망은 야구의 본바닥인 미국 직업선수들의 ‘신기(神技)’를 직접 보는 것이었다. 한 선구자가 그 같은 열망을 이루게 했다. 그가 이원용(李源容. 1896-1971)이다.
미국직업야구단(메이저리그) 초청 경기를 성사시키기까지 이원용이 겪은 고초는 이루 헤아리기 어려웠다. 메이저리그는 고사하고 야구에 대한 인식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았던 1920년대 초에 많은 돈을 들여서 메이저리그 선발팀을 조선 땅에 데려온다고 했을 때, 조선체육회 이사들이 이원용의 제안에 목청을 돋우어 반대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원용은 1920년 7월 13일에 출범한 조선체육회의 창립 주역 중 한 명이었다. 그가 고원훈(高元勳. 1881-?) 조선체육회장의 동의를 받아 1922년 11월에 메이저리그 선발팀 초청을 이사회에 정식 안건으로 올렸지만 고루한 이사들은 “금전을 받고 기술을 파는 직업선수를 조선야구계에 소개할 필요가 절대로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초청 지원을 거부했다.
이원용이 우여곡절 끝에 사비를 들여 초청했던 메이저리그 선발팀은 일본을 거쳐 그해 12월 8일 경성(서울) 용산철도국 운동장에서 조선선발팀과 맞대결을 펼쳐 23-3으로 크게 이겼다.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 같은 싱거운 경기였지만 걸음마 단계였던 한국야구가 본바닥의 야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큰 경험이었다.
한국야구 초창기 야구선수 출신이자 언론인, 체육행정, 체육 잡지발행 등 다방면으로 활동했던 이원용이 ‘메이저리그 선발팀 초청 비화’를 최초로 털어놓은 것은 월간 대중잡지인 『실화(實話)』를 통해서였다. 이원용은 1938년 11월 1일에 발간된 『실화』 제1권 제3호(1938년 11월호)에 ‘17년 전 미국직업야구단 초빙비화(十七年前 米國職業野球團招聘祕話)’라는 글에서 한국야구 초창기 전개 과정과 더불어 자신이 주동해서 기어코 성사시켰던 메이저리그 선발팀 초청 뒷얘기를 상세하게 풀어놓았다.
이원용은 그 뒤에도 월간 잡지 『신태양』 1956년 6월호(제5권 제6호, 통권 46호)에 ‘야구반세기야화(野球半世紀의 野話)-짚신 신고 野球하던 時節의 이야기’에 이어 한국야구 최초 공인야구규칙서인 『야구규칙(野球規則. 1956년 10월 10일, 대한야구협회 발행)』 안에 그가 정리해놓은 ‘한국야구약사(韓國野球略史)’에서도 메이저리그 선발팀 초청 비화를 털어놓았다.
1956년 같은 해에 나온 『신태양』과 『공인야구규칙』에 실린 이원용의 글은 『실화』의 ‘초빙 비화’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지만 같은 내용이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세부적인 수치가 다르다. 더군다나 ‘한국야구사’와 관련된 연도는 여러 가지 사실 오류를 범하고 있다. 기술의 시점이 20년의 시차를 보이는 데 따른 기억의 착오로 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가장 중요한 경기를 한 연도와 결과를 놓고 『실화』에서는 일본연호인 다이쇼(大正 11년=1922년)와 “조선군은 이석찬, 김정식 군 등의 안타로 3점인가 얻어서”라고 돼 있으나 『신태양』과 『공인야구규칙』에는 “1921년 가을, (…) 29-2로 우리가 패전을”이라고 오기했다.
대회를 주최했던 조선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1922년 12월 8일 오후 2시에 개막된 경기의 결과는 3-23이었다.
이원용이 메이저리그 선발팀을 초청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이원용은 ‘미국직업야구단초빙비화’ (『실화』)에서 “대정(大正) 11년에 조선으로 미국직업야구단을 초빙하려는 계획은 너무 대담한 일이었다. 우리보다 기술이 월등하게 우수한 내지6대학(內地六大學) 선수가 그들 앞에서 꼼짝 못하고 마치 어린아이들 같은 취급을 받는데…, 어찌 그들을 조선으로 불러올 용기가 있으랴. 그러나 야구의 진수를 우리 조선야구선수들과 일반호구가(一般好球家)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억제할 수가 없었다.”고 토로한 데서 추진 동기를 알 수 있다.
당시 조선체육회는 1920년부터 3년간 야구대회 등을 개최해 적립금 2천여 원이 있었다. 하지만 고원훈 체육회장은 초청 취지에는 찬동하면서도 지원에는 소극적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이원용이 그해 11월 중순에 이사회 소집을 요청, 그 안건을 다루게 됐다. 이사 8명 가운데 이원용을 뺀 나머지 학교 관계자였던 이사 7명이 모두 적립금 손실을 우려해 반대를 표명, 이를테면 체육회 차원의 초청은 무산됐다. 이원용은 초청을 반대했던 이사들을 익명으로 처리(모 교장 C선생)했으나 『신태양』에서는 휘문고 교장 임경재(任暻宰)와 경신학교 체조선생 박우병(朴宇秉)으로 실명 거론했다.
이원용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고원훈 체육회장에게서 여비 2백 원을 얻고, 동일(東一)은행에서 5백 원을 빌려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었던 투수 박석윤(朴錫胤)을 앞장세워 고베에 묵고 있던 메이저리그 선발팀 헐버트 헌터 감독을 만났다.
헌터 감독이 “조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차가운 반응을 보였지만 이원용은 같은 호텔에 묵으면서 경기장을 따라다니며 사흘 동안 졸라댔다. 어렵사리 초청 허락을 받아냈으나 정작 가장 중요한 돈 문제가 가로막았다. 당시 메이저리그 선발팀은 도쿄에서 가졌던 일본 방문 첫 경기의 개런티만 2만 원을 받았다. 헌터 감독은 조선에 가는 조건으로 5천 원을 요구했다.
이원용은 “개인의 사재(私財)로 초청하는 것이니만큼 개런티로 천 원 보장 외에 경기 당일 입장권 매상고 전액을 제공”하는 선에서 조건을 매듭짓게 된다.
당시 메이저리그 선발 선수단은 모두 26명이었고, 그 가운데 감독 겸 주장 헐버트 헌터를 포함 선수는 17명이었다. 선수단 일행에는 여배우 3명과 모리아리티 심판의 아들(14세)도 들어 있었다. 미국 선수단은 트리플 에이(A) 선수들을 주축으로 메이저리거는 투수 허브 페낙(보스턴 레드삭스)과 웨이트 호이트(뉴욕 양키스), 1루수 조지 켈리(뉴욕 자이언츠) 등 3명이었다. 이들 3명은 훗날 미국 쿠퍼스 타운의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에 헌액됐던 유명 선수였다.
미국 선수단은 7일 일본 규슈 나가사키 항을 떠나 부산항을 거쳐 “1등 객차 일량(一 輛)을 전용으로 연결해 경성역에 도착” 했다. 선수단의 숙소는 조선호텔이었다.
“미국직업야구단 일행이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면서 철도국, 조선신문사 등에서 주최권을 팔라는 교섭이 들어오고 안창남(비행기 조종사) 환영 비행회 개최에 여념이 없던 동아일보도 사설을 써서 환영하는 등 시내의 인기는 아연히 비등하기 시작했다. 당시 스포츠 기사로는 이 같은 장거를 신문 지상에 선전할 방법을 몰랐다. 최근까지 명 기자로 활약하던 이길용(李吉用) 기자도 그때에는 동아일보 대전지국에 재근 중이어서 스포츠 기자가 되기 전이었다. 할 수 없이 조선일보사와 교섭했다.”(이원용의 회고)
이원용은 조선일보로 가서 “밤을 새워 원고를 써서 호외(號外)를 만들어 가지고 8일 새벽부터 자동차로 시내 각처로 선전을 하였다.”고 기술했다. 아마도 그 호외가 스포츠 관련으로는 한국 언론 사상 처음 있었던 일로 추정된다.
장애는 또 있었다. 경기장으로 삼을 용산철도국 운동장이 얼음으로 뒤덮여 있던 것이다.
“그때 경성에는 지금같이 완전한 야구장이 없어서 입장권을 판대야 설비의 불완전으로 담을 뛰어 넘어오는 자가 유료 입장자보다 몇 배나 더 되는 현상이었으니 입장료 수입도 얼마나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용산철도국운동장을 교섭, 사용키로 했으나 얼음이 일척(一尺, 한 자) 이상 덮여있어 어찌할 방법이 막연했다.”는 그의 기억만으로도 그 광경이 짐작 가고도 남는다.
때는 12월 초순, 이미 초겨울로 접어든 데다 운동장에는 얼음이 한 자 두께로 얼었다니, 요즘으로선 상상조차 어려운 광경이었을 터. 이원용은 “철도국 야구부원 제군의 호의로 공무과 소속 공부(工夫) 4백여 명을 각지에서 소집, 주야 겸업으로 얼음을 캐내고 휘발유를 부어서 말려놓으니 경기에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고 운동장 정리 광경을 전하고 있다.
작업했던 인부들의 숫자가 『신태양』에서는 “8백여 명을 동원시켜 40여 시간 만에 완전한 복구를 보게 됐다”고 써 곱절로 늘어났다. 인부의 숫자야 하여간에 그 노력이 가상하다.
메이저리그 선발팀과 전조선군(全朝鮮軍)의 맞대결의 입장권료는 지정석 5원, 내야 3원, 2원, 외야 1원으로 정했다. 이원용은 “조선에서는 처음 되는 요금을 받았지만 7천여 명 관객에 입장료 매상 금액은 1천6백 원밖에 안 됐다. 야구의 입장료 수입으론 전일(前日)에 보지 못한 금액이었으나 운동장 설비비용이 7백여 원, 연회비 3백여 원, 기타 잡비 합해 총 결손액이 2천여 원이었고, 박석윤 군이 어음할인에 공동책임을 진 2백5십 원 외에는 내가 모두 유출했다.”고 수지결산을 밝혀놓았다.
당시 1원이면, 그야말로 거액이었다. 1919년 단성사(극장) 입장료가 특등석 1원 50전, 1등석이 1원이었다고 하니, 지정석 5원을 요즘 화폐가치로 환산한다면 20만 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원용은 서울의 부호 집안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성학교를 나와 YMCA 영어과를 수료했다. 한국야구 초창기 명 1루수였고, 심판으로도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는 1920년 6월 16일 조선체육회 발기인회(서울 인사동 명월관) 창립준비위원 10인, 조선체육회 창립 초대 이사 7인 중 한 명이었다.
동아일보 운동부 기자였던 이길용(李吉用. 1899-1950?)은 ‘운동기자열전’(신동아 1934년 3월호)에서 이원용에 대해 “중앙기독청년회(영어과)를 마친 군은 현존한 조선야구계의 대선배로 자타공인한다. 조선체육회를 발론(發論)한 시초의 한 사람으로(…), 조선의 야구사를 알아낸다면 알아낼 사람도 군이요, 가장 오랜 문헌을 들추자고 하여도 군이다. 이중국(李重國) 군과 함께 1920년 초반 ’제일운동구점‘을 경영한 일이 있으니 조선인으로 운동구 상점이 생기기 시초이다. 박석윤(朴錫胤)과 함께 미국의 대전구단(大戰球團)을 막대한 희생을 하여 가면서 조선에까지 청해 온 일 조선 구계(球界)에 남긴 가장 큰 사실이요 공적이다.”고 칭찬했다.
이원용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조선일보』 운동부 기자로 4년간 근무했고 1933년 7월에는 스포츠 잡지 『조선체육계』를 발행했다.
이원용은 한국야구 발전 단계에서 초창기에 방향을 바로잡고 꾸준히 노력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고 해도 그리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단순한 경기인의 범주를 넘어 이원용은 그야말로 팔방미인이었다. 야구선수 출신으로 야구심판으로 활동했고, 체육행정은 물론 신문기자, 잡지 발행인, 『공인 야구규칙』 저술, 운동구 점 운영 외에도 메이저리그 선발팀 초청 프로모터에 이르기까지, 체육, 특히 초창기 한국야구에 관한 한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었다.
그는 젊은 시절 메이저리그 초청과 잡지 발간 등으로 가산을 탕진, 말년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다가 1971년 12월 14일 타계했다.
글, 사진/홍윤표 OSEN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