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백종인 객원기자] 위대한 얘기에는 위대한 인물이 필요하다.
오래 전 일이다. 그러니까 1958년 9월 말이다. AL 타격왕 경쟁이 막판까지 치열했다. 남은 것은 마지막 2경기 뿐이다. 그런데도 1, 2위가 안갯속이다. 타율 0.32258…. 소수점 5짜리까지 똑같다. 레드삭스의 집안싸움이다. 테드 윌리엄스와 발빠른 유격수(좌타자) 피트 러널스가 각축을 벌였다.
감독(핑키 히긴스) 입장이 애매하다. 모른 척 하자니 뭣하고, 그렇다고 개입하기도 그렇다. 먼저 고참(윌리엄스)을 불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조금 지친 기색인 것 같다. 타율 관리가 필요하냐는 의미였다. 전설에 대한 예우였으리라. 마침 경쟁 상대 역시 타격감이 별로였다. 타율을 조금씩 까먹고 있었다.
하지만 괜한 배려다. 타력만큼 한 성격하는 캐릭터다. 눈을 부릅뜬다. “어떻게 하다뇨. 당연히 나가서 쳐야죠.” 하긴, 묻는 게 이상하다. 17년 전에도 그랬다. 4할에 턱걸이할 때다. 마지막 더블헤더를 앞두고 0.39955였다. 가만히 있으면 만사 OK다. 전무후무한 기록이 남는다. 감독(조 크로닌)도 말렸다. 그러자 발끈한다. “그건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이죠.” 결국 두 경기에서 8타수 6안타를 쳐냈다. 위대한 숫자는 반올림이 필요없었다. 당당한 0.406으로 남겨졌다.
어쨌든. 1958년 9월 27일~28일, 경쟁자는 공평하게 출전했다. 결과는 분명하게 갈렸다. 윌리엄스가 8타수 5안타, 러널스는 10타수 3안타였다. 타율 0.328 대 0.322. 전설의 승리였다. 생애 6번째 타격왕을 차지했다.
통도사 극락암에서의 득도
2006년 초 부산이다. 새 감독이 부임했다. 우승의 추억을 남겨준 강병철 씨다. 화려한 취임식이 열렸다. 그런데 불참자가 생겼다. 24세 풋내기 4번 타자다. 이유도 애매하다. ‘깊은 산중이라서….’ “아니, 한겨울에 산에서 뭘 하는데.” 신임 감독이 직접 길을 나섰다. 경남 양산의 통도사를 찾는다.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 한 암자에 당도했다. 극락암이다.
반쪽(?)이 된 4번타자와의 해후다. “이까지 오시느라 욕봤지예?” 해맑은 표정으로 노감독을 맞는다. 체중이 쏙 빠진 이대호다. 50일간 산중 수련으로 감량과 하체 강화에 성공했다. 고질이던 허리 통증도 사라졌다.
그 해. KBO리그에 트리플 크라운이 탄생했다. 타격, 홈런, 타점을 휩쓸었다. 이만수 이래 22년만의 위업이다. “극락암 두 달 동안 귀신하고도 친해진기라.” 득도한 빅보이였다.
이대호 대 이정후, 더블 캐스팅
타격왕 레이스가 숨 가쁘다. 주연 배우가 몇 번이나 교체됐다. 초반은 호세 피넬라의 원맨쇼였다. 4할 고공행진, 독주체제였다. 하지만 6월 이후 급전직하다. 월간 타율이 0.216으로 심각하다. 어느 틈에 4위로 밀렸다.
이 사이 판도 변화가 생겼다. 이대호와 이정후의 양강 구도다.
(참치마요, 김치마요, 은퇴마요) 3대 마요는 꾸준하다. 4월부터 6월까지 기복이 없다. 0.356-0.355-0.341로 한결같다. 반면 24세 히어로는 폭발적이다. 6월(0.392) 들어 급가속한다. 그리고 경쟁에 뛰어들었다. 둘의 차이는 0.001, 접전 양상이다.
** 타격 순위 (7월4일 현재)
바람의 손자는 디펜딩 챔피언(2021년 0.360)이다. 젊고, 빠르고, 정확하고, 강하다. 기술적으로도 완성형에 가깝다. 프로 6년차, 전성기를 맞았다. 절정의 기량으로 치르는 방어전이다. 이제껏 2년 연속 타격왕은 3명 뿐이다. 고(故) 장효조(1985~87년), 이정훈(1991~92년), 그리고 20대 후반의 이대호(2010~11년)다.
경쟁자는 노련함, 꾸준함 빼고는 내세울 게 없다. 오히려 핸디캡 투성이다. 일단 나이가 많다. 40번째 생일(6월 21일)이 진작에 지났다. 어쩔 수 없는 에이징 커브를 견뎌야 한다. 한여름 버틸 체력도 걱정이다. 결정적으로 덩치 큰 우타자다. 프로필 기준 194cm, 130kg이다. 내야 안타는 언감생심이다. 오히려 수비마저 깊게 선다. 웬만한 타구로는 빼기 어렵다.
‘화려한 파편’의 위대한 기록들
최종전까지 치열했던 1958년. 테드 윌리엄스의 생애 6번째, 그리고 마지막 타격왕 시즌이다. 40세 29일에 얻어낸 영광이다. 이는 현재까지도 AL 최고령 기록으로 남았다. (NL은 배리 본즈의 40세 71일.)
미디어는 그를 ‘화려한 파편(Splendid splinter)’이라고 불렀다. 예술적인 타격을 묘사한 애칭이다. 첫 타격 1위는 1941년이었다. 기념비적인 4할을 찍을 때다. 당시 나이 23세였다. 그리고 마지막 정상은 17년뒤인 40세 때다. 이렇게 긴 시간 차이는 ML 최초이자 마지막이다. 스탠 뮤지얼도 14년 정도였다(1943년→1957년).
불혹의 타자에게는 버겁다. 어찌 보면 승산 희박한 레이스다. 불리한 요소들이 차고 넘친다. 상대는 젊고, 빠르다. 그에 비해 나이 들고, 둔하다. 게다가 경쟁자는 하나 둘이 아니다. 기나 긴 일정, 방방곡곡의 고수들이 호시탐탐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뜻깊은 여정이다. (최고령) ML 기록에 대한 도전이다. (올 9월 말이면, 그의 나이 40세 3개월이 넘는다. 윌리엄스는 물론 본즈의 기록보다 많아진다.) 16년만의 타격왕 탈환 역시 마찬가지다. 테드 윌리엄스의 17년에 근접한 숫자다. 본고장에서 60년 넘게 남겨진 기록들이다. 조선의 4번 타자.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위대함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칼럼니스트 일간스포츠 前 야구팀장 / goorada@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