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전조가 있다. 대형 사고가 일어나기 전 수많은 작은 사고와 전조 증상이 있다는 뜻에서 ‘하인리히의 법칙’이라는 용어도 있다. 류현진(35·토론토 블루제이스)에겐 오타니 쇼헤이(28·LA 에인절스)를 꺾은 그날이 그랬다.
▲ 의문의 65구 교체, 불운 예고
지난달 27일(이하 한국시간) 토론토-에인절스전이 열린 에인절스타디움. 류현진은 5회 마지막 타자 오타니를 체인지업으로 헛스윙 삼진 잡으면서 선발승 요건을 갖췄다. 이날 경기 첫 탈삼진. 투구수는 65개에 불과했지만 토론토는 6회부터 류현진을 내리고 불펜을 가동했다.
오타니와 선발 맞대결에서 승리투수가 됐지만 의문의 65구 조기 교체가 궁금증을 낳았다. 찰리 몬토요 토론토 감독이 류현진을 못 믿어서 내린 것이라는 해석이 뒤따랐다. 여러 데이터상 그렇게 봐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경기 후 몬토요 감독은 “류현진이 팔에 약간의 타이트함을 느껴 예방 차원에서 교체했다. 계속 던지게 하며 (부상)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앞서 4월에도 2경기 만에 팔뚝 염좌로 부상자 명단에 다녀온 류현진이었다. 그는 “지난 부상과 이어진 것은 아니다. 오늘만 일시적으로 그런 것 같다”며 “100% 몸 상태로 경기하는 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정말 작은 부분이다. 부상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큰 문제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코칭스태프에 몸 상태를) 빨리 말했다”고 말했다.
▲ 괴물답지 않은 표정, 솔직 발언
먼저 교체 의사를 전할 만큼 류현진 스스로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 경기에 나갈 것이다”며 정상 등판을 자신했다. 그로부터 5일 휴식을 갖고 2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홈경기 선발투수로 출격했다. 경기 전 몬토요 감독은 “류현진의 몸 상태를 주의 깊게 보겠다”며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했다.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류현진이 4회 투구를 할 때부터 토론토 불펜에서 로스 스트리플링이 몸을 풀기 시작했다. 이닝을 마친 뒤 덕아웃에서 피트 워커 토론토 투수코치와 말할 때 류현진의 얼굴은 완전히 굳었다. 늘 포커 페이스를 유지해온 류현진에게 좀처럼 볼 수 없는 굳은 표정이 모든 것을 암시했다. 4이닝 58구 교체. 경기 후 류현진은 더더욱 그답지 않았다.
“경기 초반에는 좋은 투구를 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에 ‘이제 더 이상 무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수코치님한테 얘기해서 교체했다”고 밝힌 그는 “오늘 경기 전까지는 후회를 안 했는데 경기 후에는 조금 후회한다”며 정상 등판 강행을 자책하기도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늘 정형화된, 예상 가능한 답변만 해온 류현진답지 않게 솔직한 발언이었다.
▲ 피할 수 없었던 수술, 고뇌 끝 결단
이튿날 부상자 명단에 다시 오른 류현진은 검진 결과 팔뚝 염좌에 팔꿈치 염증까지 발견됐다. 이후 2주가량 여러 의사들에게 2차 소견을 받은 끝에 팔꿈치 인대접합수술, 이른바 토미 존 서저리를 받기로 결정하며 시즌 아웃됐다. 지난 18일 닐 엘라트라체 박사에게 수술을 받고 재활에 들어갔다. 최소 1년 이상 재활이 소요됨에 따라 선수 생활의 중대 기로에 섰다.
돌이켜보면 왜 에인절스전을 마친 뒤 정상 등판을 강행했는지 궁금증이 생긴다. 하루이틀 정도 추가 휴식을 갖거나 아예 로테이션을 한두 번 건너뛰는 방법도 있었지만 류현진은 정상 일정을 고수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책임감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FA 고액 연봉 선수로서 책임감이 컸을 것이다. 지난 2019년 12월 토론토와 4년 8000만 달러에 계약한 류현진에겐 3번째 시즌이다. 지난해 후반기부터 이어진 부진을 감안하면 시즌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추가 휴식을 갖거나 로테이션을 건너뛴다고 해도 수술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류현진은 한국에서 1269이닝을 던진 뒤 미국으로 건너가 1003⅓이닝을 던졌다. 16시즌 통산 2272⅓이닝. KBO리그 통산 이닝 기준으로 그보다 많이 던진 투수는 송진우(3003이닝), 정민철(2394⅔이닝) 둘뿐이다. 포스트시즌(한국 34⅓이닝+미국 41⅔이닝), 국제대회(51⅔이닝)까지 포함하면 류현진의 통산 이닝은 2400으로 늘어난다.
속된 말로 팔 빠져라 던지고 또 던졌다. 흔히 분필에 비유되는 투수의 팔이고, 류현진의 팔도 오랜 세월만큼 닳았다. 누구보다 재활의 고통을 잘 아는 류현진이지만 복귀까지 시간이 짧은 부분 수술이 아니라 완전한 토미 존 수술을 결정했다. 완벽한 팔 상태로 복귀하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조금 더 감내하기로 했다. 오랜 고뇌 끝에 내린 결단이다.
지난한 재활의 시간과 다시 마주한 류현진에겐 희망적인 사례가 있다. 저스틴 벌랜더(휴스턴)는 37세에 토미 존 수술을 받고 돌아와 39세의 나이에 사이영상급 성적으로 건재를 알리고 있고, 다저스 시절 동료 리치 힐(보스턴)도 39세에 팔꿈치 내측측부인대 재건 수술을 받은 뒤 지금까지 현역 최고령(42세) 투수로 롱런 중이다.
성공 확률 7%에 불과한 어깨 관절와순 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재기했던 류현진이라면 그들처럼 못할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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