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투수용이 아닌데? 오타니의 특이한 글러브 <야구는 구라다>
OSEN 백종인 기자
발행 2022.06.21 10: 21

이치로의 골드글러브 수상 소감
[OSEN=백종인 객원기자] 일본 M사는 세계적인 스포츠용품 제작사다. 희끗희끗한 장인들이 여럿이다. 쓰보타 노부유시라는 인물도 그 중 하나다. 정부 훈장을 받은 야구 글러브의 명인이다. 70세가 넘어 후계작업에 들어간다. 기시모토 고사쿠가 후임자로 내정됐다. 40년간 조수로 일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승계는 간단치 않다. 까다로운 절차가 남았다. 누군가의 OK 사인이다. 바로 M사 최대의 고객, 스즈키 이치로다. 2000년대 초반, 시애틀에서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다.
내정자는 심혈을 기울여 후보작 (글러브) 50개를 제작했다. 그 중 가장 잘 된 6개를 골랐다. 그리고 시애틀행 비행기에 오른다. 매리너스 클럽하우스에서 심사위원(이치로)을 만났다. 긴장감 속에 품평회가 시작된다. 하나하나 끼어 보면서 코멘트를 남긴다. “이건 못 쓰겠네요.” “네, 이것도….” 그렇게 6개 모두 거절당했다. 퇴짜에 1분도 안 걸렸다. M사의 세대교체도 중단됐다. 와신상담의 6개월 후다. “이건 좀 쓸만하군요.” 비로소 합격 통보다.
그 해 이치로는 7번째 골드글러브를 수상했다. 그리고 이런 소감을 남겼다. “올해 유난히 긴장을 많이 하면서 수비해야 했습니다. 만약 이 상을 받지 못했다면 (새로 글러브를 만들어준) 기시모토 상이 자기 책임이라며 크게 낙담했을 것입니다. 난 그렇게 되지 않도록 늘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스즈키 이치로. / OSEN DB
검지 보호대의 창시자 – 허샤이저
오렐 허샤이저는 다저스의 전설이다. 1988년 월드시리즈 때 MVP였다. 전무후무한 59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의 보유자다. 5연속 완봉승은 덤이다. 그런 그에게도 내리막은 있었다. 던질 때마다 털리던 시절이다. 뭐가 문제지? 한동안 밤잠도 설쳤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동료 한 명이 지나는 말로 힌트를 준다. “이봐 친구. 손가락이야. 커브 던질 때 검지가 움직인다구.”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보이긴 뭐가 보인다는 거야. 글러브 안에 있는 손가락인데. 쫓아가며 다그쳤다. “뭐라는 거야?”
그제서야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반대편 손, 즉 글러브 낀 왼손 얘기였다. 커브 그립을 잡을 때, 글러브 밖에 나온 왼손 검지가 함께 움직인다는 것이다. 눈썰미 좋은 타자들에겐 걸리기 쉬운 버릇이다. “어쩐지.”
불독(허샤이저)은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오래된 버릇이 금세 고쳐질 리 없다. 궁리 끝에 글러브 제작사인 L사와 상의했다.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L사 직원의 한 마디였다. “그럼 거기에 캡을 씌워 드릴게요. 안 보이면 되잖아요.”
이후 그는 은퇴할 때까지 검지 보호대(?)가 달린 글러브를 사용했다. 조금 지나니, 많은 투수들이 따라한다. 요즘은 거의 대부분 투수들이 당연하게 쓰는 장치다.
[사진] 왼쪽이 다저스 시절의 허샤이저. 오른쪽 인디언스 시절부터 검지에 캡이 생겼다. ⓒGettyimages(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필수템 검지 보호대와 철통 웹이 사라진 디자인
올시즌 ‘투수 오타니’는 특이한 글러브를 쓴다. 일반적인 트렌드나, 상식에 반하는 모델이다. 필수로 여겨진 아이템들이 몇 가지 빠졌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검지 보호대다. 허샤이저 이후 다들 하는 장치다. 그걸 없앴다. 야수들의 글러브와 다를 게 없다. 손가락이 훤히 보인다.
또 하나 다른 게 있다. 엄지와 검지 사이, 즉 망(web) 부위다. 야수용은 그물 모양으로 얼기설기 얽혔다. 안쪽이 얼핏 엿보인다. 하지만 투수용은 아니다. 완전히 막혀 있다. 그러니까 밖에서는 빛조차 들어갈 틈이 없다. 손가락이나 실밥이 철통보안이다. 구종 노출 걱정 탓이다. 그런데 오타니 것은 틈이 있다. 야수용보다는 조금 막혔지만, 투수용 치고는 훤한 셈이다.
그는 일본 A사 모델이다. 용품 전체를 이곳에서 전담한다. A사의 제품 설명은 이렇다. “작년까지 외야수용으로 사용하던 모델을 개량해서 쓰고 있다. 스프링캠프 때 본인이 요청해 새롭게 제작했다. 망 부위는 '크로스'로 불리는 십자형이다. (공 잡는) 그립을 가리기 위해 세로 부분을 가죽을 2조각에서 4조각으로 늘렸다. 새끼 손가락과 약지는 같은 부분에 2개를 넣도록 디자인했다. 손가락 끝까지 힘이 전해지기 쉽다.”
[사진] 오타니가 지난 해 쓰던 글러브. 검지 캡과 망부분이 확실하다. ⓒGettyimages(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 시즌 사용하는 디자인. 아식스 홈페이지 캡처
야구에 200% 진심인 그다. 그러면서도 무던한 것 같다. 이치로나 허샤이저 처럼 유난스럽지는 않은 것 같다. 하긴 그렇다. 퍼포먼스 자체가 파격이다. 틀을 깨고, 상식을 초월하는 것들이다. 투타 겸업, 이도류 말이다. 글러브 역시 고정관념을 벗어난다. 오타니,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다.
칼럼니스트 일간스포츠 前 야구팀장 / goorada@osen.co.kr
에필로그
2015년 8월이다. 일본 치바에서 열린 롯데-니혼햄 전이다. 오타니 쇼헤이가 등판 준비에 한창이다. 슬럼프 기미를 보이던 시절이다. “그날따라 유독 나비가 많더라구요. 불펜에서 몸을 푸는데, 여기저기 팔랑거리는 거예요.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더라구요.” 9이닝 동안 12K 무실점. 완봉승을 따낸 날이다 (상대 선발 이대은). 이 때를 기억하려 글러브에 문양을 새겼다. 한동안 그의 시그니처 무늬는 호랑나비였다.
글러브에 새겨진 나비 문양.  / 오타니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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